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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HI Oct 24. 2024

다음 역

NEXT STATION - 단편집 미히버스(MIHIVERSE) 수록작

“다음 역은 다음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내리실 문입니다.”


귀를 의심했다.


“츨입문 열립니다.”


호기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열차 밖으로 나갔다.


승강장에 사람은 나 외엔 없었다.


내리는 승객도 나 뿐이었다.


사람들은 고요하게 자기 할 일들을 하며, 열차가 정차 중인 “다음 역”은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출입문이 닫혔다.


사람들의 몸이 부드럽게 뒤로 쏠리는가 싶더니,


열차는 나를 두고 그대로 출발해버렸다.


승강장에는 커다란 글씨로 “다음 역”이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나가는 곳’이라는 안내판을 찾아 화살표 방향대로 걷기 시작했다.


계단이 있었다.


나는 계단의 개수를 세며,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모두 28 계단이었다.


대합실이 나왔다.


회전식 개찰구 너머로 역무원실이 보였다.


‘저기로 가면 이 역에 대해 뭔가를 물어볼 수 있을거야.’


나는 회전식 개찰구 앞에 섰다.


단 하나의 회전식 개찰구가 있었는데,


그 것은 종이로 만들어져, 에어컨 바람에 나풀대고 있었다.


그 옆에 역무원실까지 이어지는 공간은 텅 비어있었다.


‘꼭 개찰구를 통과해야만 할까?’


의문이 들었지만, 지하철에서는 개찰구를 통과하는 것이 의례 맞는 일이었다.


나는 회전식 개찰구 앞에 서서 카드를 가져다댔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종이로 만들어놓은 모형인가보네.‘


나는 회전 날개를 건드려보았다.


‘바스락’


종이가 맞닿는 소리가 나면서, 회전 날개가 조금 돌아갔다.


결국 나는 회전 날개를 수동으로 돌려 개찰구를 통과했다.


역무원실에 들어가자, 한 눈에 ‘다음 역’의 모든 것들이 표시됐다.


의자에는 도마뱀이 앉아있었다.


“어떻게 오셨죠?”


그가 물었다.


“다음 역이라고 해서 내렸는데, 여기서 나가면 어디가 나오죠?”


내가 물었다.


“여기서는 나가는 길이 없어요.


유일한 방법은 ’다음 역‘의 다음 역으로 가는 거죠.


이 곳은 지하철의 내부 세팅만을 담아놓은 세계니까요.“


그가 한 화면을 가리켰다.


그 곳에는 계단 5개가 있었고 그 위에 안내판이 놓여있었다.


나는 안내판에 보이는 글자를 읽어보았다.


’/* 현재 구현 중 */'


나는 그 화면을 한참 보다가, 도마뱀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여긴 어디죠?“


내가 물었다.


”이 곳의 이름은 다음 역, 지하철에 응당 존재해야 할 것들을 구현해놓은 곳이죠.


세계의 모든 지하철역은 모두 이 곳을 참고로 해서 만들어집니다.“


그가 말했다.


“개찰구가 종이로 만들어졌던데요.”


내가 이어 물었다.


“핵심적인 개념만 구현하면 충분하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그걸 보고 개찰구라고 떠올릴 정도면 됩니다.


여기에 어떤 것을 가져다놓으면,


세계의 모든 ‘지하철’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그에 맞게 변형이 되지요.“


그가 설명했다.


“이런 곳이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군요.”


내가 말했다.


”제가 예시를 하나 보여드리죠.


저기 쓰레기통 보이시죠?”


도마뱀이 역무원실 한 켠에 놓인 한 물건을 가리켰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 것을 바라보았다.


둥근 철제 판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형태의 통이었다.


“저 것이 쓰레기통일 수 있는 이유는 아래가 막혀있고, 위가 뚫려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저 안에는 항상 제가 먹고 버린 단백질 바 껍질이 들어있거든요.


그게 저걸 쓰레기통으로 만들죠.“


나는 자세히 가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과자 껍데기가 하나 들어있었다.


“그걸 가지고 와보시겠어요?”


도마뱀이 말했다.


나는 도마뱀의 말을 따랐다.


“그걸 뒤집어 보시지요.”


도마뱀이 내가 가져온 쓰레기통을 힐끗 보더니 말했다.


“아, 그건 무척 깨끗합니다. 제가 앉아있는 이 의자만큼이나요.“


그가 덧붙였다.


“바닥에 껍질이 떨어질텐데 괜찮나요?”


내가 물었다.


“그게 핵심입니다.”


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나는 그의 말을 따랐다.


“이제 이건 의자입니다.


위가 막혀있고,


앉기에 충분히 튼튼한 재료로 만들어져있죠.“


나는 그 위에 앉아보았다.


“네, 정말 의자로서 부족함이 없겠네요,”


나는 도마뱀이 앉아있는 등받이 의자를 힐끔 쳐다보며 덧붙었다.


“보조 의자로 말이죠.”


도마뱀은 만족스럽게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한 행동으로, 이제 세계의 모든 지하철에는 쓰레기통이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저건 이 역에 단 하나뿐인 쓰레기통이었거든요.”


나는 깜짝 놀라 말했다.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구요?”


도마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지하철들은 이 곳의 모습을 비추는 그림자와 같습니다.


이 곳의 무언가가 수정되면,


전세계는 즉시 그 영향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도마뱀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태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나는 조금 불안했다.


”그럼 지하철이 쓰레기장이 되는거 아닐까요?“


내가 말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일은 희박합니다.


그런 나라도 있겠지만요,


웬만하면 정책이 수정되게 되어 있습니다.


공공장소에서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엄격히 금지된다거나,


쓰레기를 줍는 직원을 더 채용하게 될 수도 있구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지하철 역사 안에 ‘쓰레기통’을 둔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할 겁니다.


밖에는 쓰레기통이 넘처나더라도 말이죠,


입구로 들어오는 순간, 쓰레기통이라는 개념은 머리 속에서 사라지는거죠.


모든 개념은 이 곳에 있는 것만을 참고하게 되어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래도 천재같은 사람이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을텐데요, 유레카 하고 말이죠.“


내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당신이 와있는 이 세계의 저편에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정의하는 곳도 있지요.


그 곳에서 인간은 ‘모방’하는 존재로 규정되어 있어요.


그 곳의 제약이 먼저 풀리면 모를까, 인간의 머리 속에서는 더이상 지하철에서 쓰레기통을 떠올리는 일은 없을 겁니다, 당신이 의자를 원래대로 되돌리지 않는다면 말이죠.“


그가 말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내가 앉았던 의자를 빙 돌려 뒤집었다.


그리고 그 안에 바닥에 떨어져있던 과자 껍질을 집어 넣었다.


“자, 다시 이 세계에 쓰레기통이 생겼군요.”


도마뱀이 말했다.


나는 시계를 쳐다봤다.


“이제는 슬슬 회사로 가야할 시간이네요.


벌써 출근 시간이 한 시간이나 지났어요.


지각 소명을 해야할텐데,


혹시 지하철 지연증명서를 발급해주실 수 있을까요?


‘지하철이 오동작하여 다른 경로 진입’ 정도의 사유면 될 것 같은데.“


내가 말했다.


도마뱀은 테이블 한 켠에 올려진 지연증명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거기에 내가 말한대로 사유를 써주었다.


나는 지연증명서를 들고 역무원실을 나섰다.


“인간이 여길 오는건 드문 일이에요.


우연이 세 번 겹쳐야 올 수 있는 곳이지요.


오신 김에 무언가를 바꿔보셔도 좋겠습니다.“


뒤에서 그가 말했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에, 나는 종이로 만들어진 개찰구를 다시 한번 만났다.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그 개찰구를 구겨 작은 공으로 만들고 내 가방 안에 넣었다.



작가의 말


모든 것이 그대로일 거라 생각하는 순간, 세상은 작은 변화로 인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로, 사소한 행동 하나가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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