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여전히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셨고, 나는중학교 진학도 포기한 채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꾸리며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고 있었다. 배우고 싶었으나 기회가 없었고, 꿈이 있었지만 결국 포기를 선택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도망과 희생의 날들이 계속되었다.
늦은 밤이면 술에 취한 아버지가 휘두르는 술병을 피해 집에서 자주 도망쳐 나오곤 했다. 그날 밤에 올려다본 하늘은 어찌나 아름답던지. 어둠 속에서도 달은 언제나 모습을 바꿔가며 날 비춰주었다.
그리고 혼자 집을 나올 때면 언제나 그렇듯이 오빠가 나를 찾아주었다. 어두운 달빛 아래 움츠려있던 내 곁에 다가와 상처받은 내 마음을 보살펴주었다.
“혜자야, 이런데 혼자 있으면너무 위험해. 내가 함께 있어 줄게.”
“오빠...”
“많이 힘들지. 내가 빨리 돈을 벌면 우리 함께 나가서 살자꾸나.”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오빠의 미소가 달처럼 예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달과 같은 사람. 외롭고 어두운 내 삶에서 오빠는 달과 같은 사람이었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언제나 내 곁에 있는, 아주 다정하고 상냥하게 내 마음을 보듬어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며칠 뒤,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왔을 때, 부엌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부모님은 외출 중이고 동생들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라 지금은 아무도 없을 텐데. 고소한 계란후라이의 냄새가 은은히 풍겼다. 나는 누가 집에 있는 건지 확인하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조용히 밥상을 차리고 있는 오빠가 있었다. 평소처럼 내게 밝게 웃어주었지만, 오늘따라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빠의 눈에는 슬픔이 묻어 있었다.
“혜자야, 왔니?”
오빠는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잠시 멈칫했지만, 곧바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혜자야, 배고프지? 여기 좀 앉아봐. 내가 밥 차려줄 테니 든든히 먹으렴”
오빠는 작은 밥상에 갓 지은 밥과 계란후라이를 내어주었다. 마침 배가 많이 고팠던 나는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상 앞에 앉아 크게 한 술 떠먹었다. 오빠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문득, 웃고 있는 오빠가 굉장히 슬퍼 보였다.그의 말투와 행동이 그 어느 때보다도 지치고 힘겨워보였기 때문이다.
“혜자야, 학교도 못 가고 살림하는 거 많이 힘들지? 힘들 거야, 동생들 돌보는 것도 다... 그래 힘들 거야...”
“나는 괜찮아 오빠. 그런데 오빠는 무슨 일 있었어?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보여?”
“그래도 혜자야, 낳아주신 부모님을 어떻게 미워할 수 있겠니. 그렇지? 우리 혜자는 반드시 건강하고,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
오빠의 말속에서 묘한 결의가 느껴졌다. 슬픔에 젖은 오빠의 눈을 보니, 내 마음도 불안하게 요동쳤다.
“오빠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그냥, 내가 널 잘 챙겨주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미안해서. 혜자야, 나 어딜 좀 다녀올게. 조금 늦을 것 같으니 기다리지 말고 밥 먹고 있으렴”
이 말만 남기고 오빠는 짐 하나 없이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오빠는 영원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후, 오빠는 하늘의 별이 되었다.
갑작스러운 오빠의 소식에 온 마을은 눈물로 잠겼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어린 동생들도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에몇 날 며칠을 눈물로 지새웠다. 나도 오빠의 소식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오빠는 나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고, 어둠 속에서도 빛이 되어준 사람이었기에. 그가 떠난 뒤, 나의 세상은 더욱 깊은 어둠에 잠기고 말았다.
나중에 오빠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알게 된 것은, 오빠의 온화한 미소 뒤에 감춰진 깊은 슬픔들이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뎌왔는지, 얼마나 깊은 고통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맏이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게와, 맏이기 때문에 그 누구에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외로운 이야기들. 오빠는 나에게 씩씩하게 살아가라고 했지만, 스스로는 그 힘을 다 소진한 상태였음을.
오빠가 떠난 후, 나는 매일 눈물을 흘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달은 여전히 밝게 빛나고, 떠난 오빠를 더욱 그리워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며 나는 몇 번이고 조용히 다짐한다. 오빠의 바람대로 씩씩하게 살아가겠다고. 오빠가 걱정하지 않도록, 보란 듯이 잘 살아내겠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