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 숙주에 대한 이야기
외계인은 마치 물속에 떠 있는 것 같이 한동안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마치 물속에서 정확하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소리가 나는 것을 겨우 인지하는 것처럼 시스템 수호천사가 몇 번인가 ‘주인님’을 외치고서야 물속에서 물밖으로 튀어나오면 갑자기 소리가 명확해지는 것처럼, 수호천사의 음성이 명확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있었다.
본인의 마음대로 몸을 가눌 수 있게 되자, 외계인은 숙주의 기억 속으로 더욱 깊이 들어갔다. 시스템 수호천사의 정교한 안내를 받으며, 질문을 던졌다.
"이 개체의 이름과 출생 정보, 그리고 생존 기간은 어떻게 되는가?"
숙주의 기억 인지 아니면 숙주의 무의식 인지,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숙주의 정신세계 어디에선가 마치 무전기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대답이 들려왔다. "그의 이름은 박영철, 1972년 4월 1일 서울 출생으로 만 52세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뭔가 좀 어색하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아무런 지적을 하지 않아 외계인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리고, 외계인이 더 망설임 없이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려 할 때, 시스템 수호천사가 개입했다.
“주의하십시오, 주인님. 지금 우리가 다이브 하고 있는 곳은 데이터베이스가 아닌 최면에 걸린 인격으로 매우 복잡하고 감정적입니다. 천천히 접근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에 외계인은 잠시 주춤했다. 그리고 속도를 늦춰 조심스럽게 외계인의 의식이 박영철의 마지막 기억으로 향하자, 갑자기 짙은 어둠이 주위를 감쌌다. 그 어둠 속에서 박영철의 기억들이 일출 전 흐릿한 풍경인 듯 흐릿하게 떠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내 박영철의 기억들은 마치 깨져버린 대형거울의 파편들처럼 각기 다른 크기로 여기저기서 어둠을 뚫고 느릿느릿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빠르게 외계인 쪽으로 날아온다. 섬뜻하게 목숨을 거두는 망나니의 크고 긴 칼날에 반사된 한낮의 햇빛처럼 번쩍이며 날아오던 기억의 파편이 외계인 앞에서 밤하늘에 터진 폭죽처럼 부서지더니 마치 영사기처럼 그 속에 있던 기억들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박영철, 그는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죽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될 만큼 그의 행색과 안색은 가난하고 초라한 우울함에 잠식되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그 기억의 파편 속 박영철은 절망의 어둠 속에서 허우적허우적 표류하다, 지옥보다 못한 세상살이를 스스로 끝내고 싶다며 죽음으로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시스템, 인간에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왜 이 개체는 스스로 그것을 선택하려 했는가?”
외계인이 살짝 격양된 어투로 물었다. 시스템이라 불린 수호천사가 이내 외계인이 숙주의 감정을 함께 느낀 것을 눈치채고, 더욱더 감정 없는 기계가 책구절을 읽어내듯 대답했다.
"죽음은 생명의 종료를 의미합니다. 지구인들에게 이는 매우 복잡한 개념입니다. 죽음이란 것에 대해 많은 지구인들이 현실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으로 믿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것을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 즉 자살이란 것을 하는 이유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외계인이 더 깊이 박영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그의 과거인생이 마치 오래된 필름으로 상영되는 영화처럼 보였다. 박영철의 기억은 자신을 '지독한 흑수저'라고 표현했다. 외계인이 ‘흙수저’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자, 시스템 수호천사가 동기화로 불운과 가난을 상징한다는 것 등 ‘흙수저, 은수저, 금수저 등등을 설명했다.
박영철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기억이 빠르게 동시 상영되었다. 부모의 과도한 관심과 잘못된 사랑표현,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한 학업에 대한 압박, 그리고 여러 번의 사업 실패, 가족의 고통... 이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아버지의 복사본 같았다고 했다. 실패한 인생의 복사본…
어린 시절 우연히 목격한 아버지의 남들에게 피해까지 주었지만 고발되지 않은 이기적인 범법적 행동들이 그의 이기적 가치관을 형성했고, 그것이 그의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회상했다.
외계인은 박영철의 기억을 통해 그의 아버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사업가였던 아버지는 부정적이며 이기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다. 한때 잠시 사업에 성공하는 듯했지만 자신과 똑같은 잘못된 가치관을 가진 사업파트너와 동료들의 배신으로 회사의 가치가 조금 오르자마자 회사는 공중분해되고 그 덕에 아버지의 사업과 집안 모두 빚더미에 앉아 몰락했다. 그 충격으로 박영철의 아버지는 현재의 박영철 나이와 비슷한 50대 초반즈음에 뇌출혈로 인한 뇌간손상으로 심장마비가 일어나 사망하고 말았다. 스무 살에 아버지를 잃은 박영철은 갑작스럽게 처절하고 극심한 가난을 겪게되었고, 이를 견딜 수 없어 한방에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을 그만두고 사업에 뛰어들었다.
기억밖의 박영철의 의식이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야 알았네… 우리 아버지… 너무도 젊은 날에 돌아가신걸…” 억지로 입을 틀어막은 울음소리처럼 그의 흐느낌은 어둠 속으로 묻혀만 갔다.
또 다른 기억의 파편에서 사업가의 박영철이 보였다. 1990년대 닷컴 붐을 타고 사업을 시작한 박영철은 끊임없는 실패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박영철은 그의 아버지처럼 삐뚤어지고 이기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사업에 임한 그는 사업에서는 거짓말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게 사업가의 덕목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 결과 점점 더 큰 거짓말을 만들어내며 사업을 키우게 되었다. 하지만 거짓과 위선, 그리고 이기심 위에 세워진 모래성은 30년 동안 무너짐과 일어섬을 반복하며 거짓덩치만 키우다가 어느 날 스스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파도에 휩쓸린 모래성처럼 한 번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그 여파로, 그와 그의 가족은 꽤나 오랫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 기억 파편의 끝에서, 충격적인 장면들을 외계인은 보게 되었다.
박영철의 온 가족이 가까운 친척들에게 조차 거지취급을 당하는 모습…
채권자들에게 폭행당하는 박영철을 한심하게 멀리서만 바라보는 아들의 모습…
학교에서 가난냄새가 난다며 집단 따돌림과 추행을 당하는 딸의 모습…
학폭위에서 CCTV 녹화본을 통해 딸의 피해장면을 보면서도 오히려 변호사를 대동하고 온 가해학생들의 부모들에게 철저히 무시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딸이 원인 제공자로 몰리자 울고만 있는 처절한 와이프의 모습…
지구인들의 분노를 잘 알지 못하는 외계인이 보고만 있어도 화가 치밀어 오르는 장면들이었다.
이 모든 게 돈이 없어서라는 박영철의 한탄을 보며 외계인은 혼란스러웠다.
"'돈'이라는 개념, 그리고 돈의 보유가 지구인들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인가? 왜 돈이 없다는 것 만으로 이런 고통들을 일어나는 거지?”
시스템 수호천사가 설명했다. "돈은 이제 인간사회에서 단순한 상거래를 위한 수단과 도구의 개념을 넘어, 마치 인간의 생존과 존엄성에 대한 여탈권을 가지는 계급을 나타내는 기본 단위가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돈의 부재는 개인을 사회에서 고립시키고, 기본적인 권리마저 빼앗아갑니다.”
외계인은 박영철이 은행 문턱에서 쫓겨나는 모습, 직장에서 모든 권력을 잃고 모두에게 거절당하는 모습, 심지어 병원에서조차 치료를 받지 못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의 존재 자체가 사회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돈이 없다는 이유하나로 그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마저도 무시되고 상실되고 있었다.
“이건 또 뭔가… 돈을 축적한 것을 부의 축적이라 하고, 부의 축적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가난한 것, 돈이 없는 상태를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상실된 상태와 동일시 한다… 이 과정들이 반복되면서 끝내 아주 기본적인 인간으로서의 존엄성 까지도 상실해서 죽는다?” 외계인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인간에게 존엄성은 매우 중요합니다. 현대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그것을 유지하기 어렵습니다. 결론적으로 인간에게서 돈이 없다는 것은 존엄성의 상실로 이어지고 이 상황은 삶의 의지마저 앗아갑니다, " 시스템 수호천사가 대답했다.
외계인은 조금 더 자세히 박영철의 다른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사업가 박영철이 아닌 아버지 박영철이 있었다.
사업 실패 후 살던 집이 경매로 넘어가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가게 되었다. 남들보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여 얻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세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박영철은 아이들만은 자신과 다른 게 살게 하고 싶어 여기저기를 떠돌며 열심히 일을 했다. 하지만, 좀처럼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마음먹고 열심히 일했던 곳에서 돈을 받지 못하는 일도 생겼다. 그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기 시작했다. 사업의 실패로 본인 이름의 통장하나 없던 박영철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던 것 같다. 이상하게도 선진국이라는 나라일수록 사업에 실패하면 그 결과가 더 혹독하다는 것을 외계인은 수호천사의 보고로 알게 되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어서 일까? 이제 아이들의 양육비는커녕 자신의 생존마저 책임지기 어려운 상황이 된 박영철은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끔찍이도 사랑하는 아들들의 눈빛을 마주해야 했다. 날이면 날마다 겪는 모멸감과 온갖 수치스러운 기억들이 쉴 새 없이 생겨나고 악몽으로 자리 잡아 매 순간 반복해 떠오르는 것이 너무도 고통스러워 스스로 목숨을 거두고자 결심했던 것이다. 그렇게 마지막 순간으로 가던 길에 외계인의 숙주가 되고만 것이었다.
외계인은 어렴풋이 지구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존엄성의 상실에서 오는 고통, 절망, 무력감... 이 모든 것이 박영철을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자살'을 선택했군…그럼, 우리 숙주가 된 건 잘된 건가…” 외계인이 중얼거렸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잘된 거라 생각합니다." 시스템 수호천사가 말했다.
외계인은 잠시 침묵했다. 모든 것을 바라본 외계인은 지구인에게 부모란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알 것 같았다. 특히나 어린 자녀에게 무심코 들켜버린 부모의 잘못된 행동들이 어떻게 자녀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이것이 숙주에게만 일어난 특별한 케이스인지 다른 모든 지구인들이 같은 영향을 받는지 박영철의 기억으로만 일반화하는 것은 오류라고 생각한 외계인은 지구라는 행성과 이곳을 지배하고 있다는 인간이 더욱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들의 갑작스러운 개입이 서로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 생각했다. 하지만 머리만 더 복잡해질 뿐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해지는 건 지구와 인간이라는 지구인들에 대해 알려면 더욱더 많은 것들을 배워야 한다는 것은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지구인 숙주에게 좋은 일이 었는지 나쁜 일이 었는지는 우리가 평가할 것은 아닌 듯 하다… 어쨌든 우리는 우연일지라도 그의 육체와 정신을 침략한 거니까…” 이 말에 수호천사는 답하지 않았다.
“자,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외계인이 물었다.
"우선은 이 숙주를 이용해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야 합니다. 숙주의 집으로 가서 그의 컴퓨터와 인터넷을 이용하면 좋겠습니다, " 시스템 수호천사가 제안했다.
그렇게 그들은 박영철의 몸을 움직여 그의 집으로 향했다. 길을 걸으며, 외계인은 이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동시에 불안감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정체와 이곳에 오게 된 목적에 대해 여전히 의문을 품고 있었지만, 지금은 당장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외계인은 이제부터 시작될 진짜 여정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지구라는 미지의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불현듯 과거 같은 일을 했던 것 같은 느낌, 모든 것이 데자뷔인 듯 익숙한 느낌에 갑자기 등골이 서늘함을 느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어둠 속에 첫발을 내디딜 때 서늘함과 비슷한 공포감 같은 느낌이었다.
기억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스스로를 안심시키며 외계인은 숙주의 몸을 움직여 그의 집으로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