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018)
누가 그랬던가, 마흔이면 이제
흔들리지 않을 때도 되었다고.
내 나이 마흔쯤에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흔들렸으나
온갖 비바람 맞으면서 그 뿌리는 좀 더 튼실해지고
가지며 잎새 또한 좀 더 두꺼워졌지
등단을 하고 나니 이제는 시집을 내야겠는데,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 출판을 할 만한 일정 수준 이상의 작품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출판사에 의뢰를 했을 때 통과를 해야 하는 것이다. 수준에 도달하는 시가 대략 100편은 있어야 추리고 나면 60~70 편이 될 텐데 그동안 써온 시들을 보니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그해 2009년에 아들은 중1, 딸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고, 그해 겨울 친정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겨울방학 보충수업을 하던 중에 급한 연락을 받고 달려간 대학병원에서 아버지는 73세를 일기로 눈을 감으셨다. 처음에는 조금 심한 감기증세로 입원을 하셨다가 급성폐렴으로 진행이 되고 노인성 폐질환과 겹쳐서 입원 13일 만에 아버지를 떠나보내야 했던 친정식구들은 다들 황망해서 할 말을 잃었다. 이제 세월도 많이 흘렀으니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두어 편을 첨부해본다.
우리는 사랑이 고팠지.
그 시절의 아버지들은 오 남매 육 남매에게
골고루 사랑을 주고 싶어도
주는 방법을 몰랐지
울분을 토해 낼 방법이 없어 맨날 술타령
고래고래 고함이나 지르고
밥상을 엎어버리기도 했지.
참, 안타깝던 그 시절의 아버지들이
이제 세상에 거의 없지.
이 세상 어느 술집의 문을 열어도
막걸리 한잔 걸치신 얼굴 벌건 아버지 계시지 않지.
아버지 나를 업어 주지 않았네.
등에는 매일 쌀가마니 소금가마니
집에 와 누운 아버지, 나보고 등허리에 올라 서라고
꾹 꾹 밟아 달라 하셨네.
납작 엎드린 아버지
등허리 허벅다리 장딴지, 장딴지 허벅다리 등허리
괜찮타, 더 힘껏 밟아라,
아버지가 시원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었네
주먹 쥐고 콩콩 두들겨대던 그 넓적한 등허리에서
쌀가마니 소금가마니 모조리 치워버리고 싶었네.
무서운 아버지, 술을 먹은 아버지
밥상이 날아가고 김치쪼가리 처박히고
깨진 그릇을 줍다 피를 보았네.
더 이상 밟을 수 없는 아버지
술을 이기지 못하는 아버지, 담배연기 폐 속으로 박혀버린
아, 늙어버린 아버지
이제 소리 내지 않고 속으로만 부르는 이름
에미야, 나 괜찮타, 아주 편하다,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던 날
등허리 반듯이 펴서 누우시던 날
달디단 신음 소리 나는 들었네
끄-응-, 흙이 따뜻하게 품어 주었네.
햇볕 잘 드는 봉긋한 房
꽃도 피고 새도 울고 바람 잘 통하는 아늑한 남향 房
아궁이에서 지핀 불이 방고래로 타고 들어
구석 구석 군불 돌아들어 허리 지지기 딱 알맞은
아버지의 땅 한 평.
아가,
저 꽃들이 나를 숨 막히게 하는구나.
여리고 고운 이파리 하늘 하늘
내 속살도 저리 새하얄 때가 있었어야,
수줍어 눈도 못 뜨고
발갛게 달아오르던 때 있었어야,
바람 한 번에 우수수 지고 마는
이 꽃천지, 이 별천지,
아가,
쉬었다 가자.
니 아부지 가신 길이 저런 길이 아니까
한 세상 고단하게 살아내신 양반
꽃 길 걸어 훨 훨
고개 너머로 사라지고 말았어야
참말로 순간이고 말았어야
마음은 둥둥 떠오르는데
다리는 천근 만근 가라앉누나
더 오지 마라네
이제 그만 내려 가라네
아가, 한숨 쉬지 말아라.
네가 바로 저 분홍 꽃잎이고
꽃 지고 난 자리에 돋아나는
푸른 이파리인 것을
지금은 모르는 게야,
靑春은 짧고
짧아서 저리도 아름다운 것을,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면서 나는 무언가 나를 감싸고 있던 껍질이 한꺼풀 벗겨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흔히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보아야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들 하는데 나는 거기에 추가해서 부모님의 죽음을 겪어 보아야 비로소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부모님께 우리는 늘 때늦은 반성문을 쓰는 것 같다.
그리고 또 나의 사십 대 후반에 시어머님께서 유명을 달리하신다. 일제시대에 일가족이 만주로 피신하여 살다가 해방 이후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 산청으로 돌아와 6.25를 겪고, 자식들 뒷바라지에 안 해 본 일 없이 그야말로 억척같이 살아내신 분이셨다. 매사에 걱정을 많이 하는 성격 탓에 자식들에게 잔소리를 입에 달고 사셨지만, 자신이 살아낸 세월에 대한 옛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우리 근현대사의 산증인 같았던 시어머니를 2014년에 보내드리게 된다.
2014년 큰아이는 고3이었는데 수능을 2주 앞두고 십자인대 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 해를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가슴 한 켠이 아릿해져 옴을 느낀다. 세월호 사고로 인해 전국민이 심각한 트라우마 속으로 빠진 해이기도 했고, 이래저래 나의 사십대 후반부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겪은 시기였다.
할머니가 신새벽 바닷가에서 비워냈던 요강
요강단지 속 내 오줌은
바닷물 타고 멀리 멀리 파도에 실려 어디까지 갔을까
풀꽃 시계를 만들어 내 손목에 채워주던
풀물 들어 손이 시퍼렇던 그 아이는
그 아이의 울음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장수풍뎅이 한 마리 잡아서 발라당 뒤집어놓고
팔다리 떼어 꼼짝 못하게 장난질하던
오오, 그 몸뚱이는 잘 썩었을까
죽은 언니가 찾아와서 술을 마셨다던
분명히 차 있던 제 술잔이 어느새 비어 있더라던
스무 살 때 내 친구는 지금 잘 살고 있을까
깊은 후회도 눈물도 없이
함부로 걸어온 길이 내 길이 되었으나
어느 황혼 녘
지퍼가 허술한 가방을 메고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채
나는 어느 쓸쓸한 바닷가를 헤매고 있을까
다른 집 아그들은 김치 쪽도 척척 잘만 찢어 묵는데
아 애비는 입이 짧아 김치도 물에 씻어 주었어야
김치 국밥도 휘 휘 물 타서 멕였지야, 그 때는
똑, 밥 밖에 먹을 게 없었어야, 과일도 우유도 없었어야
잔칫집에서 고기랑 떡이랑 얻어온 거 먹이면 탈나고 날았어야
못 먹어서 못 컸지야, 키 작다고 너무 괄세말어라
내가 소쿠리장사 사과장사 안 해 본 게 없었지야
하루는 부산 아재 집에서 신문지 뭉치를 가뜩 얻어 오는데
열 두어살 어린 놈 등짝에 그 짐을 얹어 걸리고
추운 겨울 밤 십 리 길을 걷는데 그래도 꼭 지가 지고 간다고 고집을 부렸지야
아서라 말아라 바람은 쌩쌩 부는데
내 짐도 한 짐 애비 짐도 한 짐, 그 때는 신문지도 귀했어야
불기 없는 냉방에 털썩 신문지 짐을 내려놓던
그 귀때기 새파랗던 애비가 나이 오십이라니
입이 짧아 무던히도 내 속을 썩이던 애비가 하이고 벌써 오십이라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어느 퇴원하던 날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했지, 후루룩
그녀는 뜨거운 것을 좀 넘기고 싶다고 했지
국물 몇 모금, 면발은 넘기지도 못했지
낡은 좌식 테이블에서 끙하며 일어서는 순간
휘청, 부실한 무릎은 중심을 잃었네
그녀의 전 생애가 크게 휘청거렸네
나는 젊은 며느리
나에게 가르쳐야 할 게 아직 많이 남아있어
걱정 가득한 그녀를 얼른 받아 안았네
팔십 하고도 중반까지 살아내느라
몹시도 지친 그녀를 가벼운 아기 같은 그녀를
꼬옥 안아 주었네
이제 마음 놓고 넘어져도 된다고
내가 다 받아줄 테니, 당신의 삶 이어갈 테니
마음 놓고 훌훌 떠나셔도 된다고
가만히, 라는 말
참 아름다운 이 말이 어느 날
끔찍한 말이 되어 버렸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정말로 가만히 쪼그리고 앉아 있던 아이들
그 착한 아이들이 나란히 앉아
바닷속으로 사라진 그날 이후로
나는 가만히, 라는 말을
함부로 쓰지 못하네
옆에 가만히 있어 준다는 이 아름다운 말을 만나면
흠칫
그날의 분노에 몸이 떨려오네
가만히, 라는 말 하나가
두고두고 날 울리고 가네
병간호가 많았던 나의 사십대 후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