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개미 Sep 04. 2024

본격 릴레이션십에 진입하다

고백은 누가 먼저, 언제 해야 해?

V와 데이팅앱에서 매칭되고 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많이 대화하진 않았지만 그가 보내는 길고 진지한 문자가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영화나 음식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어봤던 그의 말에 나는 "스타워즈!"라고 대답했다. 한창 만달로리안 시리즈에 빠져 있던 차라 좋아하는 영화가 무엇인지 대답에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V는 본인의 집에 초대하고 싶다고 했는데, 나는 그가 안전한 사람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밖에서 만나자고 제안했다. 처음 만난 건 저녁 10시가 넘어서였다. V는 재택근무를 하는데 14시에 일이 시작할 때면 저녁 늦게 일이 끝나서 일을 끝내고 만나자고 한 거였다. 가려고 했던 바가 만석이라 거리를 걸으며 자리가 있는 곳을 물색했다. 여기도 만석, 저기도 만석. 지칠 때쯤에 한 진토닉 바에 자리가 있었고 우리는 들어가서 대화했다. 한 소파에 앉았는데 V는 내가 편하게 느껴졌는지 몸을 소파에 뉘었다.


사실 V는 3개 국어를 쓰는데 그중 영어를 제일 못했다. 나는 독일어 초급 수준이라 독일어로 대화하는 게 불가능했고 어떻게든 영어를 써야 했는데, 그의 영어 발음이 너무 딱딱해서 절반을 못 알아들었다. 나중에 V를 본 내 친구는 러시아권 사람이 영어 쓰는 거랑 비슷한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 왜 독일에 온 거야?

나는 내가 왜 직업을 그만두고 독일에 왔는지 설명했지만 V는 단번에 이해하지 못했다. 캐나다와 스페인같이 멋진 다른 나라도 있지 않냐며, 왜 굳이 우중충한 독일에 왔냐는 거였다.


공교롭게도 어학원 같은 반 친구들 중에 캐나다 친구와 스페인 친구가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래도 독일은 직업 구하기가 다른 나라보다 낫고, 워라밸이 있는 삶이 있다고. 아직도 V는 아직도 이 두 나라에 대한 환상을 못 버렸다.

주제는 취미로 이어졌고 영화 이야기가 나와 어떤 영화를 좋아하냐고 다시 물어보길래, "스타워즈 좋아해"라고 대답했더니

- 사실 나 스타워즈 별로 안 좋아해

라고 말하며 본인이 좋아하는 영화 몇 편과, 스타트렉이 더 재밌다는 이야기를 덧붙이는 거였다.


이렇게 첫 데이트의 인상은 -100점이었지만 V는 이상하게 내가 제일 편하게 대화할 수 있는 상대였다. 영어로 100퍼센트 말이 통하지 않아 편했을 수도 있지만,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같이 시간을 보내고 난 후에 이 '편안함'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냥 나대로 행동했을 때 제일 재미있었다. 나를 '동양인 여성' 프레임으로 보았던 다른 남성들과는 달리 영화나 음악, 그리고 이런저런 취향에 대해 편하게 대화가 가능했다. 놀랍게도 우리는 꽤 공통분모가 많았다. 핑크플로이드를 좋아한다든가 넷플릭스 시리즈 취향이 정말 비슷했다. 본 영화도 많이 겹쳤다.


V와 세 번 만난 뒤에 부활절 연휴가 겹쳐서 2주가 넘게 보지 못했다. 나는 베를린에만 있기 심심해 어학원 친구와 같이 부다페스트, 비엔나, 프라하 세 도시로 여행을 다녀왔다. 부다페스트에 도착해 그토록 멋진 야경을 두 눈으로 본 순간, V 생각이 났고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 사람들은 릴레이션십까지 시간이 걸린다길래 '두고 보지 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전달해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 야경 앞에서


그래서 숙소로 돌아와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고백공격은 아닙니다. 확실히 썸을 타고 있었어요!) V에게서 답장이 왔다.

- 내 마음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나도 같은 마음이야.

며칠 뒤 내가 릴레이션십을 제안했고, V는 긴 문자로 예전 연애에서 회의감이 들었지만 나와 함께하는 건 좋을 것 같다며, 생각해 보더니 긍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우리는 이렇게 연인 관계가 되었다. 세 번 만나고 먼저 고백한 나는 친구들한테 '상여자'라는 말을 들었다. 수동적으로 연애해 왔던 지난날들과 달리 내가 먼저 마음을 표현하고, 릴레이션십을 제안했더니 나의 마음에 더 확신이 들었던 것 같다. 


천천히 상대방을 알아가는 독일 사람들, 고백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독일문화. 이런 인식이 전반적으로 있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나를 제외하고서 내 친구들도 릴레이션십까지 비교적 빠르게 진입했다. 아마 마음이 확실하고 서로의 속도가 비슷하다면 국적불문 그렇게까지 오래 걸리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건 어느 게 좋다/나쁘다, 빠르다/느리다 말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간다면 비슷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오랜 친구들과 친해졌듯이 말이다. 


그래서 V는 스타워즈를 보았냐고?

아니, 우리는 다른 시리즈를 보느라 정신없어서 스타워즈를 같이 못 봤다. 그렇지만 올해의 버킷리스트 중 하나!




이전 03화 인스턴트 만남으로 가득한 데이팅앱 사용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