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원 받는 사람은 뭐든지 할 수 있어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집에서 글을 쓰고 있다니.
작년부터 원고를 준비한 '슈팅 라이크 쏘니'가 출간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이번 책을 준비했던 기간은 1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소설가가 되는 상상을 해온 건 고등학생 때부터였다.
부모님은 고향인 섬으로 귀농하시고, 열일곱이던 나는 목포에 혼자 남아서 매일 밤을 쓸쓸함에 뒤척였다.
남고생의 자취생활에는 혼자 남겨진 자의 자유함도 있지만 그 옆엔 고독함도 나란히 앉아있다. 그때부터 나는 혼자 있는 사람의 쓸쓸함을 알았다.
어쩌다가 글을 쓰겠다고 결심하게 됐을까.
늦은 밤 라디오에서 나오던 멋진 말들을 블로그에 받아 적고, 밤새도록 영화와 드라마를 보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인터넷카페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서로 쓴 글을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럽게 글을 쓰게 됐다.
고등학생 때 누군가에게 내 글을 보여주겠다는 결심으로 끙끙대면서 11페이지짜리 소설을 써서 교실 뒤 게시판에 붙여놨다. 친구들에게 읽어보고 댓글도 달아달라며 옆에 포스트잇과 펜도 뒀다.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라고 표절이라던 녀석도 있었지만, 진지하게 읽고 난 후에 잘 읽었다며 포스트잇 댓글을 달아준 친구들도 꽤 많았다.
교실 게시판에 붙어있는 글을 우연히 보게 된 선생님이 교지에 내 소설을 넣어주셨다. 교지에 들어가는 학생글은 길어봤자 2,3페이지인데 무려 11페이지 소설을 넣어주셨으니, 이 사건은 내게 의미가 컸다. 교지에 실리다니! 교지도 책이라고 종이로 된 책에 내 소설이 찍히는 게 굉장히 기뻤다.
대학진학에 관심이 없던 나는 국어국문학과를 가겠다고 결심했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다 같이 공부 잘해보자는 분위기였다. 서울권 대학교를 목표로 하던 우등생 친구들이 쉬는 시간마다 내 공부를 도왔다. 힘들다고 엎드려 자고 있으면 인생 종 치는 소리 안 들리니 유철아? 하고 깨워주던 친구들도 있었다. 공부 잘하는 주변 녀석들이 마음씨도 고왔으니, 난 참 운이 좋았다.
집안 형편 때문에 꼭 국립대학교를 가야 했다. 그 당시에는 지방국립대도 수시로 지원하려면 내신 등급이 3등급은 나와야 했는데 나는 6.4등급이었다. 국립대는커녕 사립대 국문과도 못 갈 성적이었다. 하지만 쉬는 시간마다 응원해 주고 깨워준 친구들 덕에 수능에서는 3.4등급을 받아 우리 지역 국립대 국어국문학과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학교를 다닐 때는 글 쓰고 싶다는 이야기를 학과 사람들에게 하지 않았다. 그냥저냥 대학교를 졸업하고는 직업을 가져야 했다. 취업준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사람들은 국문과 졸업해서 뭐 할래?라고 말했던 어른들이었다. 왜 우리 부모님은 국문과를 가겠다는 아들을 끝까지 말리지 않았을까. 나는 더 이상 글 쓰며 밤을 새우던 고등학생이 아니다.
23년 여름, 청소년수련원에서 퇴사했다. 다녀본 직장 중에 가장 좋았던 곳. 고단해도 기쁨이 더 컸던 일터. 이게 내 적성이구나 생각할 만큼 일하는 게 즐거웠던 곳에서 퇴사했다. 준비를 더 해서 평생직장이라 부를만한 곳에 취직해야겠다고 결심해서였다.
퇴사한 그 여름 한 달간 휴식기를 가질 때 인스타그램 화면을 내리다 우연히 목포문학박람회 소식을 봤다.
슈퍼스타K 세대인 나는 심사위원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을 상상하다가 웃음이 나왔다.
요즘에는 출판오디션도 있구나. 9월 초까지 접수 마감이니 한 달 정도 남았네.
-단편소설 분야 / 10포인트로 A4 40매
난 그렇게 글을 길게 써본 적이 없는데.
의식의 흐름을 타고 가다 보니 나는 어느새 지원할지 말지에 대한 결정대 앞에 서있게 됐다.
여태까지 써본 소설들이 a4 12매 정도였는데, 40매짜리 이야기를 내가 쓸 수 있을까? 아마 안될 거야 하는 생각도 잠시, 이번만큼은 꼭 해보자는 파이팅의 소리가 메아리쳤다.
올여름 주어진 휴식기 한 달, 이건 나를 위해 써보자 결심이 섰다. 이번만큼은 취업이나 다른 고민들을 내려놓고 글만 써볼까. 아니 꼭 그래야겠다. 어찌 되든 지원해 보자.
그리고 '슈팅 라이크 쏘니'가 세상에 나왔다.
누군가는 잊고 살았을 어렸을 적 꿈. 그 마음의 불씨는 꺼질 듯 말 듯 항상 잔잔히 내 속에 남아있었다. 여태 이 마음을 간직하기까지는 가족들과 지인들의 응원이 있었다.
아버지는 술 한잔 하실 때면 ‘그래도 나는 유철이가 글 쓰는 건 계속하면 좋겠다 요즘도 쓰고 있냐?’ 말하곤 하셨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 때 써준 ‘어머니’라는 시를 지금도 시골집에 걸어놨다.
우리 누나는 내 이야기가 재밌다면서 다음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만날 때마다 들어준다.
직장 생활하면서 언젠가는 책을 내고 싶다는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준 많은 사람들.
2023 청년신진작가 출판오디션
본선 전날, 아빠가 목포에 나와서 누나와 셋이 삼겹살 집에 갔다. 대회에서 수상 못할 확률이 커 보였다. 떨어졌을 때 아빠 마음이 어려우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삼겹살이 입에 잘 안 들어갔다. 그때 누나와 아빠가 응원의 말을 건넸다.
뽑히지 않아도 괜찮다. 되면 좋겠지만 꼭 될 것 같아서 그 자리에 식구들이 가는 게 아니다. 네가 좋아하는 글 쓰는 일을 여태 잊지 않고 해 왔고, 그런 행사에도 참여하는 게 기뻐서 다 같이 축하하러 가는 거다. 그러니 어찌 되든 내일은 좋은 날일 거다.
안심이 됐다. 그리고 다섯 명 수상자를 부를 때, 마지막 순서로 내 이름이 불렸다.
출간 소식을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알리고 인스타그램에도 올렸다.
내가 아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먼 친척들. 고등학교 동창부터 대학교 선후배들.
타지로 떠나서 헤어지게 된 옛 인연들.
고등학생 때 블로그를 같이 하고, 같이 글을 썼던 친구들.
밤마다 내가 라이트펜을 켜서 글 쓰는 걸 봤던 군대 친구들.
하도 연락이 많이 와서 내가 만나 본 모든 사람들한테서 연락이 온 것 같았다.
글 쓰는 게 힘들었을 텐데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요즘 자주 듣는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글 쓰는 걸 포기하는 게 더 힘들었다.
더 쉬운 길을 택한 게 오늘이다.
수많은 응원에 보답하려면 계속해서 노를 젓는 수밖에 없다.
물이 들어오든 그렇지 않든 계속해서 노를 저어보자.
나는 응원 받는 사람이니 뭐든지 할 수 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