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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유철 Nov 05. 2024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

그곳에 가서 글을 쓸까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1Q84> 속, 아오마메가는 비상계단을 내려가다가 어느샌가 달이 두 개 떠 있는 다른 세계로 가게 된다. 정확히 어떤 순간에 다른 세계로 가게 됐는지는 모른다. 다만 저녁 하늘에 떠있는 두 개의 달을 봤을 때 다른 세상에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비가 와서 세상이 젖게 되고 모든 공기가 눅눅해지고 나면, 왠지 하늘에 달이 두 개 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하곤 했다. 

비가 오는 날엔 세상에 필터가 씌워진다. 습도 때문에 어디든 젖게 되고 모든 소리에 빗소리가 포개진다. 햇볕에 눈을 찌푸릴 필요도 없다. 해가 없는 하늘은 밝기를 낮춰서 눈이 편안하다. 

감정도 평소의 것과 다르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작은 감정들이 비에 젖으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빗물 위로 짙어진 감정들이 둥둥 떠다니는데 글로 쓰지 않고 지나칠 수 있을까.


얼마 전 나만 보게 될 '일기' 같은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요즘 같이 글 쓰는 사람들 중 일기를 쓰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와 이야기하다가 문득 떠오른 아이디어다. 올여름을 간직할 '나만 볼 사진'이 찍고 싶다.

북토크에 필요한 프로필사진을 찍으러 간 김에, 사진작가님께 책을 들고 있는 내 모습을 찍어달라고 부탁드렸다. 내 방 한편에 있는 이 사진 속에는 내가 '슈팅라이크쏘니'를 들고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글과 사진은 비슷한 점이 있다. 글을 쓰는 것과 사진을 찍는 것, 둘 다 기록하기 위한 행위다. 간직하고 싶고 되돌아보고 싶은 찰나를 '사진'이란 형태로 남긴다. 글도 이와 같다. 

어느 날 내게 불어온 생각, 감정들을 글소재로서 스케치한다. 그려놓은 소재들 중 간혹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은 글로 만든다. 찰나에 불어온 소재를 글로 만드는 과정은 그걸 계속 손으로 만지며 놀이를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상상한 모양이 다른 이의 시선에도 같은 모양이도록 계속해서 글을 다듬는다. 


사진작가는 언제나 카메라를 가지고 다닐까? 셔터를 눌러야 하는 순간을 언제 어디서 마주할지 모르기 때문에 항상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는 어느 사진작가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글 쓰는 사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언제든지 내 속에 떠오르는 걸 적을 준비가 되어있다. 감정은 언젠가는 무조건 변하게 되니 글로 써야 한다. 자기감정은 처음 그대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처음과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던 고등학생 시절에는 비가 오기를 기다렸다. 비 온 후에 세상이 축축해지면 글소재가 마음속 수면 위로 떠오르길 기대하는 마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비오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장마철에만 글을 쓸 수는 없으니까.


비 오는 날 감정이 더 짙어지는 건 아직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금은 날씨가 흐리지 않아도 희미하게라도 보이는 현상과 생각들을 스케치해 나간다. 아직 잘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아직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것들을 살펴보고 만지다 보면 어느새 모양이 갖춰져서 글소재가 된다. 이제는 소재를 생각하는 모든 시간까지 글쓰기 과정인 걸 알고 있다. 

형태가 없던 것들을 깊이 묵상하며 글로 마무리까지 짓게 되면, 오히려 결과물은 내 색깔이 잘 드러나는 내 것이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글을 쓰기 위해 1Q84의 세계로 가지 않는다. 달이 두 개 떴는지, 비가 오게 될지 생각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글을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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