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여성 홍"
|소리 없는 사투의 시작|
호리호리하고 마른 몸매에 하얀 피부색을 가진 선한 인상의 홍은 베트남에서 그곳으로 장기 여행을 온 키위 (뉴질랜드 사람을 키위라고 부름) 남성의 적극적인 구애로 그와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한 후, 이곳 뉴질랜드로 그와 함께 온 지는 5년여 전이라고 하였다.
그녀보다 나이가 16살이나 많은 남편과 몇 년 전 아들을 낳고 살고 있었고, 아이가 이제 고작 3 살밖에 안 됐는데, 홍의 남편이란 작자는 매일 술을 마시기 시작했고, 평소에도 그녀를 쓸모없이 밥이나 축내는 못생긴 여자라며 욕을 퍼붓고는 하기 시작했는데, 술이 취하면 더 심한 폭력을 행사하는 등의 극심한 학대를 결혼직후부터 지금까지 쭉 해왔었다고 한다.
|아이와 함께 살고 싶어요!|
이웃들의 신고로 경찰도 여러 번 출동을 하였었고, 그때마다 홍에게 그와 따로 분리시켜 주기를 원하냐고 물으며 도움을 주려 했었지만, 그녀는 일단 영어도 굉장히 서툴렀고, 이곳 뉴질랜드에는 그녀를 도와줄 친구나 가족도 없었기에, 너무 두려워서 매번 사양을 해왔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녀가 그를 떠나면, 경제 능력이 전혀 없는 그녀는 아들의 양육권을 빼앗길 것이라 생각했었고, 그럼 아들을 못 볼 수 있기에 그저 자신만 잘 참고 견뎌내면, 그녀의 목숨과도 같은 아이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기에, 그 모든 고통을 다 감내하며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은 평소보다 그의 폭력의 정도가 지속적이고, 너무 가혹해져 갔고, 또 결국에는 고주망태가 된 그 작자가 칼로 목숨까지 위협을 하였어서, 이러다가 본인이 죽으면 결국은 아이를 돌볼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비명소리를 들은 이웃이 또다시 불러준 경찰에게 처음으로 소리를 내어 구조를 요청하게 되었고, 극적으로 탈출하여 결국은 이곳 피난처까지 한 달 여전에 오게 되었다 한다.
착하고 가엾은 그녀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청하지도 못한 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의 아이를 지키려 죽을힘을 다해 버티고 싸우고 있었던 것이었다.
|알고 보니 불법체류자|
홍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홍을 자신의 수하에 두고 제대로 컨트롤을 하기 위해서였었던 건지, 아니면 동양 여성과의 진지한 오랜 관계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었는지, 지난 5년간 자신의 아이의 엄마이자 자신의 아내였었던 그녀의 파트너십 영주권은커녕 비자조차도 신청하지 않아서, 홍은 정부 지원금도 받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뉴질랜드에 방문비자로 들어와서 정해진 기간이상을 산 불법체류자 신분이 이미 되어버린 상태였었다.
본인은 당연히 뉴질랜드(키위)인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도 낳고 이곳에서 몇 년을 살아왔었기에, 자신이 영주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곳 여성 피난소에 올 때까지 상상조차도 못했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녀가 밖에 나가는 것 마저도 철저히 통제해 온 남편 때문에 아는 친구도 전혀 없었기에, 이런 비자나 영주권에 관련된 일뿐만이 아니라, 뉴질랜드에서의 기본적이고 전반적인 생활자체도 남편에게만 의지한 채, 그녀는 그저 집안일과 그가 시키는 다른 일들을 하며 아이만 키워왔었다고 했다.
나는 그녀의 입장과 심정이 너무 가슴 아프고 공감이 백배 아니 천배가 되어서, 그녀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싶은 그녀의 멍든 가슴속 이야기들을, 내가 지난밤 간절히 원하던 "그 누군가"가 그녀에게 되어주어서 전부 들어주기로 하였다.
그녀는 서툰 영어와 손짓과 몸짓으로 그녀의 까맣게 탄 속을 또 멍든 가슴을 몇 마디 하다가 눈물이 터져버리고, 또 이어 설명하려다가 나도 같이 울고를 반복하며 한 이야기의 내용을 내가 이해한 대로 구성한 것이다.
|사람의 "급"이라니...|
그나마 나는 그들 중엔 가장 최상급(그들의 표현에 의하면)인 영주권자 피난소 거주자여서, 내가 원하면 이곳 뉴질랜드에 오래도록 살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냐고 피난소 여성들 모두들 부러워했었다.
어린 인도 여성들이나 홍도 난민 비자 신청을 해볼 수는 있지만, 혹시라도 그것이 거절될 경우에는 뉴질랜드에서 추방될 수도 있다고 하였다.
행여 자신의 고국인 인도에 돌아가게 된다면, 결혼하고 도망친 여자들이기에 자신의 부모, 가족들 마저도 반기기는커녕 수치로 생각할 것이고, 온 마을에서 지탄을 받을 것이 자명하기에, 고향에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사는 것이 그녀들의 간절한 소원이라고 하였다.
더더욱이 홍은 어린 아들을 놓고 이곳 뉴질랜드를 살아서는 절대 떠나지 못할 것이라고 울먹이며 말했다.
그녀들을 사연을 삶을 또 그 모든 배경들을 아직까지는 더 깊이 속속들이 전체를 다 알지는 못하겠지만, 같은 여자로서 (딸, 아내, 그리고 엄마로서) 그녀들에게 애잔한 연민감을 느끼게 되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힘든 일과 고통을 겪었었던 어린 인도 여자들이 왜 나에게 그렇게나 쌀쌀맞고 퉁명스러웠었는지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음을 수긍하게 되었다.
그 행동의 보이는 결과보다는, 그러한 결과가 생겨난 원인과 과정이 인간관계에서는 더 중요한 포인트임을 다시 한번 배우게 되는 깊은 사람이 되리라 다짐해 보았다.
사람들은 그저 첫인상과 단시간으로 관찰로만 판단을 한다면 많은 오해와 실수가 생겨날 수 있다는 것과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다는 착각 속에서 괴로워했었다는 것을 이곳 여성피난소에서 깨닫게 될 줄은 몰랐다.
|씁쓸한 자본주의|
인도 여성들이 내 방문을 두드렸다.
그다음 주부터는 정부 비상 보조수당이 나오게 되어서, 나는 그곳의 방값을 주별로 지불할 수 있었기에, 여성 피난소 직원이 돈이 없어 낼 수 없는 그 어린 인도 여성들에게 오늘부터 내방의 청소를 시켰다며, 청소도구를 양손에 들고 서 있었다.
너무 놀랬다. 어떻게 고통받고 힘든 여성들이 쉬어가는 피난소에서 대체.. 어떻게... 이런.... 무슨…
나는 그녀들에게서 청소도구를 건네어 달라고 하였고, 내 방의 청소는 당연히 내가 혼자 계속할 예정이니, 신경 전혀 안 써도 된다고 말하였고, 공동으로 사용하는 주방과 욕실의 청소도 순서대로 같이 하자고 말하였는데, 그녀들은 나의 그런 사소하고 당연한 제안을 호의로 생각하는 듯 고마워하였다.
이곳 여성 피난소에서까지 그 씁쓸한 자본주의란....
늘 없는 집 딸이었던 내가 그것도 무일푼으로 표류하게 된 이곳 뉴질랜드의 여성 피난소에서는 영주권 하나로 마치 부르주아라니….
인생이란 때로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블랙코미디와도 같다….
**이미지: Pexel, Pixab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