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talie Oct 16. 2024

|이방인들과의 동거|

  "내가 왜 여기에.... 꿈일 거야"


|아직 살아계신 거겠지?|


혹시 돌아가신 건 아니겠지?

왜 갑자기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거지?

오늘 밤새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건 아닐까?


오래된 나무 방문틈 사이로 희미하게 새어져 들어오는 불빛,  퀴퀴하고 눅눅한 오래된 뉴질랜드의 목조 주택,

그리고 낡은 카펫과 침대의 습한 곰팡이 냄새, 그리고 빨래 후 제대로 안 말린듯한 오래된 싸구려 침대보의 찌든 내, 그리고 가늘게 끊겼다, 또 몇 초 후 다시 들리는 건넛방 할머니의 신음 섞인 흐느낌 소리…..


처음 겪는 극한 상황에 가뜩이나 예민해져 버린 나의 오감이 깐깐하게 하나하나를 지적하고, 또 내게 일일이 실시간으로 상황 보고를 하며, 쉬지 않고  24시간 장기근무를 하고 있다.


여긴 내가 속해야 하는 곳이 아닌데.. 어쩌다가 내가 이런 공간에?...... 혹시 지금 악몽을 꾸고 있는 걸까?






삶의 마지막임을 직감하시고 서글퍼하시는 듯, 또 평생 돌봐왔었던 가족들에게서 무참히 버려지신 채, 혼자서 말도 안 통하는 머나먼 타국땅에서, 그 힘들었던 인생의 여정길을 고독하게 마감하셔야 하는 원망과 배신감 그리고 설움과 한숨 섞인 타령소리 같은 울부짖음이 밤새도록 마치,



나 너무 무섭다 얘들아!


나 아직 살아있어 얘들아 엄마, 할머니 한 번만 마지막으로 보러 와다오! 할 말이 있어... 제발!

  이런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홀로 죽어가고 싶지는 않아!  무섭고, 몸도 마음도 다 무너져 간다.

 내 집, 내 고국에 돌아가서 그곳에서 묻히고 싶어. 내가 무엇을 그리 잘못해서 엄마를 버렸니.

 제발 알려줘! 엄마가 모두 다 잘못했으니, 용서해 줘 그리고 제발 죽기 전에 한 번만 나를 보러 와줘! “

  라고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울부짖는 것만 같았다.




|죽음의 문턱의 이방인 할머니|


이곳에 내가 오기 전부터 꽤나 오래전부터 거주해 왔던 것으로 보였던, 젊은 인도 여성 두 명의 설명에 의하면 저렇게 영어 한마디 못하시고, 몸도 제대로 가누실 수 없을 정도의  중증의 병세에,  한눈에 봐도 정신상태마저 심각해 보이시는 저 인도 할머니를 누군가 (가족 중 누군가이겠지…)에 의해, 어느 버스정류장에 이불에 쌓인 채 버려지신 후,  아무도 할머니를 찾는 이가 없자, 결국 이곳에까지 보내지게 되셨다 한다.


 그래도 소리를 계속 내시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아계시다는 내게 보내시는 시그널이 되어버린 듯, 이제는 할머니의 흐느낌이 되려 안심으로 바뀌어져 가는 것 같다. 저렇게 밤새 주무시지도 못하신 채,  앓으시며, 누군가에게 계속 할머니만의 방식으로 구조 요청을 하시고 계시는 걸까? 매일밤??…..


새벽 3시 20분인데도 신음 섞인 알 수 없는 인도 언어인지 모를 웅얼거림 혹은 흐느낌이 계속 들리고 있으니까.  


지금 이 시간에 한없이 불편하고, 당황스러운 이 낯선 곳에서, 왜 나는 당장 쓰나미처럼 불어닥친 나 자신의 긴급 재난 같은 처지에도, 난생처음 보는 저 안쓰럽고 가여운 노인을 걱정하며 밤새도록 그녀의 생사를 확인하게 되는 것인지…




|내가 어쩌다가...|


그렇게나 열심히 부지런하게 공부했고, 일했고, 또  그 누구보다 더 성실하게 살아왔었던 내가  어쩌다가 어딘지도 모르는 이곳에 표류하듯이 떠밀려 오게 되었을까!


게다가 내가 자라고 나를 지지해 줄 가족들이 있는 한국땅도 아닌, 이 낯선 뉴질랜드 땅에서 알 수 없는 곳에 홀로 고립되어, 감옥 같이 어둡고 허름한 이 골방 안에서 뜬 눈으로 지새우면서, 또 생전 처음 보는 저 딱하신 노인분의 구슬픈 마지막 노랫소리에 나도 따라 나의 처지와 신세가 더욱 서글퍼지는 것일까?



절규하는 내 안의 나



설마 나도 언젠가 저 할머니처럼 처참하고, 외면당하고, 방치된 채, 병든 몸으로 외롭고 쓸쓸하게 혼자 머나먼 타지에서 삶을 마감하게 되지는 않는 걸까?…

할머니는 과연 단 한 번이라도 저런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이나 해보셨을까?!…


저분도 언젠가는 아주 소중했었던 누군가의 딸, 아내, 엄마 그리고 할머니이셨었지 않았을까….

누군가의 어머니로 어린 아기들을 키워내서, 성장한 그들 중에 이민온 누군가에 의해 이곳 뉴질랜드까지 왔을 테고, 그리하여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땅이 있는 인도에서 이렇게나 낯설고 먼 곳 뉴질랜드까지 와계신 것 일텐테....


지금 내 옆에 그저 누군가 밤새 내 이야기만이라도 들어주기라도 한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정말 이 무섭고 답답한 숨 막히는 공간에서 숨이 쉬어질 것만 같은데….


그런데 난 또 왜 저 할머니의 마음과 심정이 왜 또 이렇게도 공감이 되는 건지, 난  가슴이 미어지고, 마치 내가 사랑하는 가족들을 이젠 다시 못 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건지….




|엄마가 보고 싶어|


너무 애절하게 그리운 울 엄마의 따뜻하셨던 손


엄마, 내 불쌍한 엄마, 난 지금 한국에 계신 내 엄마가 죽을 만큼 또 애절하도록 보고 싶다!


엄마가 지금의 나의 처참한 상황을 아신다면, 가슴을 부여잡고 땅을 치시며, 피눈물을 흘리 실 테니, 절대 아시게 할 수는 없다.  절대로 말씀드리면 안 돼!!

곧 돌아갈 테고 모든 게 원래의 자리대로  또 순리대로 다 해결되면, 엄마의 사랑하는 막내딸 보시러 뉴질랜드에 또 놀러 오시면 될 테니까….


 그렇게 애지중지하셨던 막내딸을 머나먼 뉴질랜드로 떠나보내시면서, 가슴 애달프게 우시던 엄마를 공항에 남겨두고 온 지 불과 2년여 만에  내가 왜 홀로, 이 무섭고 낯선 곳에서 불안과 공포에 떨며 밤새 울고 있는 것인지... 저 할머니와 같이 나 또한 내가 이런 상황에도 쳐해 질 것이라고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었었다.


역시 인생이란 우리가 그리고, 꿈꾸며 계획한 대로 교과서대로 흘러나가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럼에도 폭풍우를 만난 우리는 위태하고 남루한 나룻배에 목숨을 내맡긴 채, 노를 절대 놓지 않으며, 결국에는 뒤집어진 뱃머리를 부여잡고, 생존하며 이 성난 폭풍이 지나기만을 기다리면서,  다음번엔 더 폭풍에 강하고 견고한 배를 마련해 보리라 다짐하는 게 우리네 삶이 아닐까….


꿈이라면 제발  빨리 깨고 싶은데, 온몸의 피가 서서히 다 빠져나가듯이 몸과  마음이 온통 무기력해지고, 가위눌림 같이 아무리 몸부림쳐봐도 손가락 하나도 절대 움직일 수 없는 듯한, 참담한 현실이 절대 믿기지 않는다. 아니 믿기를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아 그런데… 갑가지 왜! 또 이렇게 조용하신 거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데? …


잠깐 나가서 확인해봐야 하나?  새벽이라 나 외에는 모두 다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데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고 음산하고 불길한 기운이 감싸고 있는 듯한,  이 오래된 주택 자체가 너무 무섭다.

어린 시절부터 교회를 그리 오래 다녔건만, 난 아직도 귀신이 너무 무서운 32세라서… 휴 다시 소리를…

살아 계시네… 다행이다….


할머니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서 저렇게 방문을 활짝 열어두었던 것일까?  이 이상하고 수상한 주택에 머무는 나를 포함한 몇몇의 여성들과 또 이곳에서 일하는 다른 사람들이 샤워실, 화장실 혹은 주방 쪽으로 지나칠 때마다 저 방의 할머니의 생사라도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일까?



|이방인들과의 동거 첫날|


같은 아시안임에도 왠지 나를 경계하며  무시하는 듯한 눈빛, 그리고 퉁명스러운 말투의 사람의 온기 혹은 인정머리라고는 티끌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두 명의  젊은 인도 여자 두 명과, 영어는 거의 하지 못하는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매우 마른 그렇지만 선한 인상의 베트남 40대 여성, 그리고, 오늘 처음 이곳에 도착해서 이 방으로 안내받은,  충격으로 혼절직전의 32세의 한국인 여자인 나와, 그리고  생사를 넘나 들며 방치된 채, 무슨 주문을 외우듯이 슬픈 창을 타령하시면서 누워계신 저 인도 할머니....


이렇게 어떤 이유로든 내쳐지거나 혹은 위험을 피해 도망쳐서 갈 곳도, 돈도, 머물 거처도 없는 우리 5 명의 국적, 인종, 나이 또 언어마저 다른 이방인들의 동거가 시작된 이곳은 태어나서 들어도, 본적도, 또 존재하는지 조차도 몰랐던, “Womens Refuge” 굳이 우리나라말로 해석하자면 여성 임시 피난소 같은 곳이라 한다.




|어른들의 고아원|


음산한 기운의 오래된 그곳


이곳에 오게 된 그날은 금요일 오후였었다.


 5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 직원분은 나에게 간단하게 같이 같이 머물 사람들을 소개해주고,  주택안과 내가 머물 방을  안내해준후, 토마토소스가 들어있는 깡통 통조림 두 개와 외국 인스턴트 라면 3개를 주며,  본인은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만 근무라, 월요일 9시에 온다며 5 시에 그곳을 떠나버렸다. 

본인에게는 평범한 직장에서의 퇴근이 있는 그저 또 하나의 금요일이었겠지만....


재난 중에 또다시 들어닥친 쓰나미처럼, 나는  또다시 눈앞이 까마득해지며 어지러워져 버렸다.

왜냐하면 그나마 믿고 이야기할 사람이 그 유일한 한국 직원분이었는데, 나를 이곳에 태워다 주자마자 곧 퇴근을 하셔야 한다니…. 만난 지 불과 한 시간 남짓밖에 안 되는 만남이었지만, 그분마저 떠난 이 집은 마치 나에게는 감옥 아니면 버려진 어른들의 춥고 고립된 암흑 속의 고아원같이 느껴졌다.


나는 왜 상황이 이렇게 까지 급작스럽게 전개된 것인지도 처음부터 다시 천천히 돌아가서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이해불가 상태였다. 어떻게 그렇게도 열심히 살아오고, 공부하고, 생활하고, 살림하고 그리고 일까지 최선을 다했던, 또 나를 아는 많은 이들로부터 늘  똑소리 나게 잘 산다는 소리를 늘 들어왔었던 내가 이곳 머나먼 뉴질랜드 땅까지 와서는, 집도 절도 없이, 빈털터리의 난민과 같은 무기력하고 가엾은 상태로 이곳 여성 피난소까지 와있는 걸까?




|전재산 $200의 피난민신세|


피난민이 된 내 안의 소녀


이곳 뉴질랜드에 이주해 온지 단 2년 반 만에 나는 여성피난소라는 곳에 달랑 입고 있는 옷 한 벌, 그리고 여분의 속옷한벌과 화장품 1박 2일 정도 쓸 계획으로 들고 온 핸드백 겸 가방 한 개 그리고 수중에 있는 비상금 $200  (당시 한화로 13만 원 정도)이 7년여간의 결혼 생활 후 내가 가지고 있는 전재산이었다.



*이미지: Pexel, Pixbay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