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 낮의 꿈
노량진역에서 개화행 9호선 전철을 타고 한 정거장만 지나면 샛강 역이다. 전동차 문이 열리고 하복 정장차림의 말쑥한 60대 신사 한 사람이 들어왔다. 오후 2시쯤이라 전철 안엔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신사는 마침 비어있던 내 옆자리에 앉았다. 그가 앉자마자 전동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신사의 몸이 내 쪽으로 쏠렸다.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졌다. 맞은 편 유리창에 비친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인상이었다. 신사가 웃는 낯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날이 많이 덥네요.”
“예. 비 오려고 그러는지 후덥지근해요.”
신사와 잠깐 눈이 마주쳤다. 그제야 나는 그가 TV 뉴스에서 자주 보던 국회의원이란 걸 알았다. 뉴스 속의 그는 미남형 얼굴로 특히 목소리가 매력적이었다.
“TV에서 뵐 때보다 훨씬 잘 생기셨네요.”
“실물이 낫단 말을 자주 듣긴 하지만 그리 봐주시니 고맙습니다. 뽀샵 처리에 화장빨 덕분이지요. 하하”
소탈하게 웃는 모습이 선입견과는 다르게 별반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하철이 불편하진 않으신가요?”
“웬걸요. 이젠 많이 익숙해 졌습니다. 지하철을 이용한 게 초선 때부터니까 벌써 8년째 됐네요.”
옆 자리에 앉아 있던 중년 부인 두 사람이 힐끗 우리 쪽으로 고갤 돌렸다.
“초선의원 46명이었죠. 지하철로 등원하자고 약속했던 게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어요. 여야 구분 없이 똑같은 마음들이었지요.”
“시민들 반응이 참 좋았었다고 기억합니다. 국회가 바뀐 게 그때부터라고 얘기들 하더군요.”
“예. 모두들 열심히 합니다. 밀린 법안이 거의 없고 정쟁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지하철 타고 다니면 좋은 말씀들 많이 해주셔서 귀가 훤히 열립니다. 기분도 좋아지고요. 허허.”
“보수니 진보니 정치이념만 앞세우던 모습도 많이 바뀌었지요?”
“그러믄요. 젤 중요한 건 민생이지요.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겠습니까.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하는 정치, 국민을 불행하게 만드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라 망칩니다. 세우는 게 아니라 부수는 거니까요.”
전동차가 급히 서는 바람에 나는 졸다가 출입문 쪽 기둥에 머릴 부딪쳤다. 아내는 내 옆에 앉아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국회의사당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빠르게 지나갔다. 선유도역에서 내려 2번 출구를 찾아가는 사이에 머쓱해진 내가 아내에게 물었다.
“내가 얼마나 졸았지?”
“노량진역에서부터 자리에 앉자마자 지금까지 졸았어요. 고 사이에 무슨 꿈까지 꿨나봐? 입 벌리고 자는 통에 먼지만 잔뜩 들어갔을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