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내 마음속 이야기 삶의 여정 속에서 마주한 수많은 순간들, 그때는 몰랐던 의미를 이제서야 되돌아보며 깨닫는 이야기. 지나온 과거를 회고하고, 그 속에서 배운 교훈을 되새기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자 하는 진솔한 기록.
오전, 오후 학교 가기 전, 방과 후면 동네 놀이터에서 시끌벅적 아이들 재잘대는 소리와 웃음소리, 악쓰는 소리 등으로 어수선하게 분주한 움직임이 보인다. 아이들 떠드는 목소리가 와글와글 활기차다.
조용히 방에서 있다 아파트 산책길을 걷다 보니, 놀이터엔 아이들 등교하기 전, 후 친구들과 뛰어노느라 까르르 깔깔 거림이 끊이질 않는다. 사람 사는 향기가 기운차 보이고 너무 아름답게 다가온다.
언니 오빠 배웅하고 혼자 남은 어린 동생은 엄마, 아빠 손잡고 그네 타고 미끄럼틀 내려오며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직장 다니는 엄마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대신 놀아주시는 모습이 예뻐 보이기까지 하다.
예전 같으면 문 밖에만 나가면 아이들 뛰어노는 소리를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요즘 한낮에는 한적할 뿐이다. 내가 어린 시절은 놀이터라는 개념을 몰랐다. 문밖을 나가면 그냥 공터에서 뛰어놀거나 고무줄놀이, 땅따먹기, 딱지치기, 술래잡기, 주로 오징어 게임 같은 특별한 기구는 없었지만 밤이 늦도록 고무줄놀이에 빠져 재미있던 추억이 남아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된 나이. 그전엔 아이들 노는 모습 같은 건 관심조차 없었는데, 지금은 남의 아이들이라도 오랫동안 바라보게 된다. 한결같이 예쁘고 멋지다. 우리 애들 키울 때 하고는 완전 다른 모습들, 지금 아이들은 영리하고 깔끔하게 활기가 넘쳐 보인다. 그러나 놀이터엔 많은 아이들이 없다. 그만큼 아이들 숫자가 줄어들고 있음이 보인다.
이렇듯 좋은 시설을 갖춘 천국 같은 시대에 아이들이 뛰어노는 시간이 짧은 것 같다. 학원에 가거나 게임하려고 집에서 놀기 위해서란다. 안타깝다. 내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부러움이고, 그 시절 이런 게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는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놀던 손주는 떼쟁이로 변한다. 하루 종일 밖에서 놀고만 싶은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 힘든 것을 알 턱이 없다. 귀엽다.
뭐든 다 받아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손자 사랑은 옛날이나 현재까지도 내리사랑이란 표현대로 이쁘기만 할 터. 다 받아주려 애쓰는 모습에 아직 손주 손녀가 없는 난 넋 놓고 바라보며 부럽긴 하다. 애써 아닌 척 고개를 돌리려 해도 점점 놀이터 쪽으로 시선이 향하는 요즘, 나도 이제 할머니가 될 준비가 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해진다.
활기차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 때 자식 키울 때 뛰어놀던 그때와 또 다른 느낌으로 눈에 들어온다. 이렇듯 좋은 시설을 갖춘 놀이터에는 아이들만 놀지 않는다. 어른들이 지켜보고 CCTV로 집에서도 노는 모습을 보고 있다.
문명은 발전해도 세상은 불안한 일이 많아지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 순수함이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믿고 나누던 온정과 사랑은 어디로 가버린 걸까?
예전엔 서로 믿고 맡겨가며 돌봐주었던 정들은 불과 언제부터일까 찾아보기 어렵다. 이웃을 배제하며 오로지 개인 위주로 바뀌는 세대. 남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됐다. 숭고한 우리 옛 선조들의 아름다운 나눔의 사랑들이 잊히지 않도록 많은 만남의 대화장으로 놀이터가 발전했으면 좋겠다.
믿고 바라봐주는 아름다운 세상 밖, 맑은 우리 아이들, 안심하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재미있고 추억으로 남는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