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르베로스의 성을 지나 아름다운 공작의 정원을 지나는 길. 푸른 수수에 가려진 공작의 활짝 핀 날개를 보려면 선택해야 했던 길.
아직은 황량하기 그지없는 이른 봄, 야산에 진달래가 연분홍빛을 드문드문 찍어 내고, 조금 지나 봄볕이 완연해졌다 싶어지면 기다란 개나리가 바삐 샛노란 혀를 뽐내던 그 길.
드디어 초록이 당연한 5월이면 새하얀 조팝나무 꽃들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 주던 나의 통학로.
초등학교 때 나는 걸어서 통학을 했다.
아침 등굣길엔 40여 분, 하굣길엔 그보다 두 배는 더 걸리던 그 길엔 기쁨이 충만한 순간들이 많았다. 아까시 꽃, 사마귀 알, 도깨비풀....... 허투루 놓칠 수 없는 놀잇감들을 만나다 보면 오후 해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음을 그때부터 알려주고 싶었을까. 길은 내게 호기심 충족의 기회를 주는 만큼 몇 가지 난관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계절과 날씨에 따라 발생하던 주기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사시사철 날씨 따위와 상관없이 버티고 있던 한 가지는 바로 케르베로스의 성이었다.(당시에는 케르베로스를 알지 못했기에 그렇게 부르지는 않았다.)
인적이 드문 야산 아래 있던 식용 개 사육장. 케르베로스의 성.
언제고 닥칠 살해의 위협을 감지한 개들은 공포와 분노에 차 울부짖었다. 길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 소리조차 없는 행인의 기척에도 수십의 개들은 산불처럼 짖어댔다. 내가 얼굴을 들이밀어 위협하지 않았어도, 우리의 시야가 가려져 서로 마주칠 수 없었어도 개들은 늘 그렇게 화가 나 있었다. 개라면 사족을 못 쓰고 예뻐하던 그때의 나였지만,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내 목을 물어뜯을 듯이 짖어대는 개들의 위협까지는 차마 수용키 어려웠다.
케르베로스의 성을 피해 가뜩이나 먼 길을 더 휘돌아 학교를 가느냐, 잠시지만 극도의 불안을 안고 역경을 뛰어넘느냐가 매일의 아니, 하루 두 번의 중대 결정 사안이었다. 날마다 내린 선택은 달랐어도 결정의 고뇌는 계속되었다.
1년, 2년, 3년... 떡국은 설날마다 챙겨 먹었고 학년도 꼬박꼬박 올라갔지만 케르베로스의 성은 당최 무너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작아지지도 않았다. 내 키가 별로 자라지 않아서였을까. 성의 위용은 늘 제자리였다.
개들이 그렇게 사납게 짖어댔던 이유가 스트레스와 두려움 탓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안 것은 겨우 7~8년 전이다. (물론 개가 짖는 이유는 여러 가지라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두려움이 머리끝까지 차 있지만 묶여 있거나 갇혀 있으면 도망갈 수도 없으니 도무지 해소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 시절에 얼굴 모르는 케르베로스들을 불쌍하게 여겼을까? 때로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늘 어떻게 하면 그 마의 구간을 가능한 빠르게 그들에게 들키지 않고 통과할 수 있을까 골몰했을 뿐이다.
케르베로스의 성, 아니 케르베로스의 무덤이 어떤 경로로 기억 속에서 소환되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 무덤의 개들과 내가,
풀과 나무로 가려진 높은 울타리를 두고,
서로 들킬세라 깊은 두려움을 감추고 떨고 있었다는 사실이 슬픈 코미디처럼 느껴진다.
그들을 해치지 않을 나.
나를 해칠 수 없는 그들.
우리는 왜 서로를 그토록 두려워해야 했을까. 어떤 허상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걸까.
살면서 점점 확신이라는 교만을 떨 수가 없는 것은 내 눈이 알고 보면 2D 프린터에 불과함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늘어나면 서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정말 소크라테스가 이런 말을 했을까) 겸손이라는 옷을 챙겨 입는 것뿐이라는 게 왠지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