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목요 Aug 20. 2024

감사합니다. 오해해 주셔서?

왠지 잊히지 않는 오해의 기억

가을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나는 하굣길 시내버스에서 내려 언덕 아래 동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지, 3명쯤 되었을까? 키는 나와 비슷하고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이들이 내게 말을, 아니 시비를 걸었다.


“ 야~ 너 공부하냐~”


그 당시의 나는 한창 학교에서 개최하는 동시 암송 대회를 준비하던 터라, 학교, 집, 어디에서든 시를 외워댔고, 그날은 길에서도 동시를 외우며 걸어가던 중이었다. 종이, 길바닥, 허공. 오로지 시를 외우는 일에 맞춘 시선의 움직임을 반복하던 나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시선의 경로를 이탈해 사내아이들 쪽을 힐끗 쳐다봤다. 그리고는 다시 기존의 경로로 돌아와(시, 땅, 하늘... 피, 땀, 눈물...) 내 갈 길을 갔다.


나만큼이나 그 아이들도 건달 짓에 익숙하지 않았던 걸까. 무심하게 쳐다본 내 눈빛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은 더 이상 시비를 걸진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걸어 내려가며 생각했다.


'뭣 때문에 시비를 건 거지?'


일단 나를 남자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나는 6학년이었지만 만 나이는 아직 11세였고, 2차 성징 또한 오지 않은 때였다. 키는 140센티미터가 채 되지 않았고, 머리는 바가지머리 쇼트커트에, 맨투맨 티 그리고 바지 차림이었으니 그 사내아이들 눈에 남자로 보였을 법도 하다. 그렇게 작고 만만해 보이는 혼자 걷는 놈. 거기에 재수 없게(?)도 길에서도 공부를 하다니, 그들 눈에는 꼴사나워 시비 한 번 걸고 싶었을 수도.


실상이야,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예습이니 복습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숙제는 선생님한테 혼나기 싫어서 겨우 하지만 공부라고는 1도 안 하는, 학원도 다니지 않아서 늘 무료한 시간을 홀로 때우는 일을 밥 먹듯 하던 아이였는데......! 오해도 그런 큰 오해가 있을 수 없다. 나로서는 억울할 일이 아닌가.

비록 그때의 내가 학교 동시 암송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긴 했다지만......


'나를 공부만 열심히 하는 착한(?) 아이로 생각하고 시비를 걸고 싶었다 이거지?'


사내아이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대로 몇 가지 장면을 연결해 나의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단 몇십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저 아이는 이런 사람일 것이다.' 판단하고 그 생각에 맞춰 자신들의 감정을 생산하고, 감정에 따라 시비를 걸고.


그렇게 누군가를 쉽게 오해하고 행동하는 건 어른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날은 아니었지만 그 가을에 나는 아이들이 시비를 걸던 언덕길을 내려가 집으로 가는 길에 공장지대를 지나게 된다. 인가는 없고, 큰 공장의 담장만 나열되어 있어 소리가 울리는 골목이다. 매일 지나는 그 골목에는 사람들이 버려놓은 쓰레기가 자주 눈에 띄었다. 그날따라 우울했던 나는, 길가에 버려진 커피 캔이 있어 발로 뻥 찬다. 캔이 깡깡 크게 부딪치는 소리를 내자 염색공장 경비 아저씨가 득달같이 뛰어나오더니 험상궂게 야단을 친다. 먹고 쓰레기를 여기다 버리면 어떻게 하냐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더니 쓰레기를 치우라고 한다. 나는 얼결에 커피캔을 집어 들고 대꾸도 못한 채 집으로 향한다. (안타깝지만 이때도 비슷한 시기여서 머리는 쇼트커트에 나는 그저 작은 남자아이로 보인다.) 너무 놀라서,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나이 든 남자어른이 큰 소리를 질러대니까, 나는 어떠한 대꾸도 못한다.


억울한 일이었다. 나라는 인간은 거짓말도 잘 못하고, 초등교육을 매우 훌륭히 습득한 학생이기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으면 주웠지. 절대 버리는 인간이 아니었다. 커피캔을 찬 건 맞지만 내가 버린 게 아니라는 얘기다. 게다가 나는 매일 그 길을 지나다니며 그 경비 아저씨를 봤는데, 아저씨도 눈이 있다면 내가 한 번도 군것질하는 모습을, 특히 캔커피를 마시는 걸 본 적은 없을 거다.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다 화풀이한다고, 공장 앞 쓰레기가 내 탓이었을까. 매일같이 버린 놈은 따로 있는데 제 멋대로 나를 그들 범주에 넣고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쥐 잡듯이 잡았는지......

머리로야 상황을 이해한다. 지금 그 경비아저씨를 다시 만나면 나는 “뭐 오해할 수도 있지요......”하고 웃고 넘어갈 것이다. 하지만 속으론 역시 앙금이 남아 있다. 만만한 어린 나에게 으름장을 놓고 화를 쏟아내고 나의 진실함과 결백함을 더럽힌 것에 나는 여전히 억울함을 느낀다.


언덕길 사내아이들은 나를 책만 보는 모범생으로 생각해 꼴사납게 여겼고, 경비아저씨는 나를 쓰레기나 무단투기하는 아이로 보고 화를 마음껏 방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동시를 매일같이 외우며 걷던 길에 그 공장 앞 골목도 포함되는데 아저씨 눈에는 내가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는 아이로는 보이지 않았나 보다. 이쯤 되면 차라리 언덕길 세 명의 사내아이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걸까 싶기도 하다.



살면서 우리는 자주 오해를 하고, 오해를 받곤 한다. 그런데 자신이 오해하는 것에는 관대하고 오해받는 것에는 그렇지 못하다.



나는 내가 오해받기 싫은 만큼, 오해하고 싶지 않아서 역지사지를 해보곤 한다. CCTV를 돌려보듯 사건을 정리한다. '상황이 이러저러하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수 있겠구나. 저 사람은 이 장면을 저렇게 봐서 나한테 저러는 거구나.' 하고 넘어가고는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갈수록... 나. 만. 이해하고 넘어가는 일이 반복된다. 나만 그들의 시각을 되짚어 본다. (호*가 되는 느낌이랄까) 이렇게 의도한 바와는 다르게 자꾸 손해 보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이해하기를 포기하게 되나 보다. 왜? 노력은 어렵고, 손해는 보기 싫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서로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순간 더 큰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까 싶다. 내가 남을 이해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이 늘어날수록 화가 나를 잠식하는 시간도 늘어가곤 하니까.



덧 : 사실 나만 이해하고 넘어가진 않았겠지. 누군가 나를 이해하고 넘어간 일도 많았으리라 생각한다. 그 사실을 고맙게 여긴다. 그리고 내가 오해하고 지나간 알지 못하는 일들에 수신처 없는 미안함을 전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