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3-23 일요일
보스턴은 평화로운 도시였다. 이틀간 미술관, 마켓, 대학교 등 다양한 곳을 구경했고, 로컬 맛집에서 랍스터 롤을 주문하여 먹기도 하였으며, 라이브 공연이 진행되는 바에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여유를 즐겼다. 밤늦게 돌아다니는 것이 무섭기는 하였으나, 무섭다는 이유로 이곳에서만 해볼 수 있는 경험을 놓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보스턴을 잘 즐긴 뒤 22일 아침 뉴욕으로 향하는 기차에 탔다. 기차는 중간에 고장이 나서 갈아타느라 결국 약 6시간 만에 뉴욕에 도착하게 되었다. 지하철을 타고 호스텔로 가서 짐을 내려놓고, 그날은 타임스퀘어만 구경하고 피곤해서 일찍 잤다. 앞으로 뉴욕에서 5일이 더 남았으니까!
뉴욕에서의 첫 아침은 러닝으로 시작했다. 러닝을 취미로 하게 된 이후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뉴욕에서 러닝하기'였다. 현지 러너들과 함께 뛰며 뉴욕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었고, 그것만을 위해 터질 듯한 가방 속에 기어코 러닝화를 구겨서 넣어 왔었다.
JAY-Z의 Empire State Of Mind를 들으면서 high line을 달리니 '내가 정말 뉴욕에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는 어바인보다 훨씬 추웠지만, 그래도 뛸만한 날씨였다. 목적지는 첼시마켓에 있는 'Los Tacos'라는 가게였는데, 타코가 맛있기로 유명한 체인이었다.
첼시마켓에 도착하자 점심 시간대여서인지 사람이 아주 복작거렸다. 어찌저찌 타코집을 찾아서 메뉴를 살피려는데, 마켓 직원분께서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하며 말을 거셨다. 나는 '타코 주문하려는데, 메뉴 추천해 주실 수 있어요?'라고 여쭤보았다. 직원분은 타코 메뉴를 추천해 주셨고, 혼자 여행을 왔냐고 여쭤보셨다.
나는 너무 오랜만에 하는 사람과의 대화에 반가움을 느꼈다. 19일 오후부터 23일 오전까지 사람과 나눈 대화라고는 식당 점원에게 말한 '이거 주문할게요'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연히 만난 미국인과 영어로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해서, 그 자리에 서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름이 무엇인지, 나이는 몇 살인지, 전공이 어디인지, 미국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등 가벼운 질문과 답변을 나누었다. 그분께서는 브루클린에 살고 계셨으며, 낮에는 첼시마켓에서 일을 하지만 밤에는 다른 일을 하고 계셨다. 뉴욕이 좋냐고 물으시기에, 내가 있던 캘리포니아와는 정말 다르고 신선하다고 말했다. 물가는 비싸지만 음식도 맛있고, 캘리와 달리 할 게 많아서 좋다고. 나도 같은 질문을 되물었더니, 그분께서는 뉴욕이 답답하고 싫다고 말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의외였다. 하기야 나도 서울에 처음 왔을 때는 좋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질렸던 것을 생각하면 뉴욕도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이제는 배가 고파서 타코를 먹고 싶었는데, 그분께서는 나를 놓아주지를 않고 약 30분 간 계속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문제는 그분이 점점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는 것이었다. 또한 가까이서 보니 얼굴도 약간 상기되어 있고,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혹시 술을 마셨냐'라고 여쭤보니, 어제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잠을 거의 못 잔 상태로 마켓에 일을 나온 것이라고 했다. 점점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것처럼 느껴져서 슬슬 도망치려고 했다. 그분께서는 오늘 밤 브루클린에 있는 좋은 바에 데려갈 테니 함께 술을 마시자고 권했다. 나는 밤에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는 거짓말을 하며 작별인사를 했고, 드디어 타코를 맛볼 수 있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분명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그리운 순간들이 온다. 나에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다가오면 '이게 여행의 묘미지!' 생각하며 쉽게 받아줄 수 있다. 그러나 여행 중이라고 해서, 이곳에서는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다고 해서 아예 정신줄을 놓아서는 안된다. 그 첼시마켓 직원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교환했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 사람의 팔로잉 다수가 아시안 여성이었다. 낯선 사람과 영어로 대화하고 친구가 되는 재미있는 경험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를 보고 나니 머리가 싸해졌다. 혼자 다니는 여성 여행객들에게 다가오는 남성들은 가능하면 정말 주의하자. 그러한 방식으로 인연을 만나는 것에 로망이 있을 수 있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정상적인 사람일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으면 한다.
타코를 다 먹고 나서는 첼시마켓을 좀 구경하고 싶었는데, 그 사람이 자꾸만 나를 찾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피해 다니느라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곳에서 일을 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아무쪼록 하고 싶은 꿈 이루고, 잘 사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