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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랍비 Aug 28. 2024

어쩌다 생활지도

벌레 포비아인 특수교사의 고군분투

교실에서 일하던 중 ‘짝’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 놀란 가슴에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러자 비장애 아이들 몇몇이 모여 복도에서 언쟁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싸움 같은 건 아니다.

하지만 교사인 내가 나타나자, 이들 중 몇몇은 도망가듯 서둘러 하교했다.

나는 그 중심에 있던 세 명의 아이를 붙잡고 물었다.

*비장애인: 장애가 없는 일반인(사람은 살아가며 언제, 어떤 상황으로든 장애를 가질 수 있기에 비장애인으로 부르기도 한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를 책망하며 말했다.

 

“아니요. 선생님, 저 얘가요. 이거를 막 슬리퍼로 내리쳐서…” 


자세히 보니 엄지손톱 정도의 거미가 처참하게 짓이겨 죽어있다.

상황을 정리해 보니, 남자아이는 거미가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슬리퍼를 들어 내리쳤고 여자아이는 뭐 하러 거미를 죽이냐며 언쟁하던 중이라는 것이다.

나는 빠른 상황 파악으로 이 일과 상관없던 여자아이를 먼저 집에 보내고, 옆의 구경꾼들도 모두 하교시켰다.

그리고 거미를 죽인 남자아이에게 물었다. 


“거미를 왜 죽인 거니?”

“그냥요. 징그러워서요.” 


그래. 인간은 본디 자기와 다르게 생긴 걸 혐오하게 설계된 동물이다.

그렇기에 4족 보행의 강아지와 고양잇과의 동물은 사랑하면서도 다리가 없는 뱀 같은 동물이나 다리가 지나치게 많은 거미와 지네류의 동물을 광적으로 싫어하지 않는가!

아마 4족 보행은 인간의 팔다리 개수와 똑같기에 이해할 수 있는 반면, 그 외의 종들은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뭐, 아닐 수도 있지만.

이는 장애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그러한 차별적 시선을 멈추기 위해 생태학적, 사회문화적 진화를 이루었고 장애인을 대하는 방법 또한 굉장히 발전했다.

하지만 아직 사회화가 덜 된 초등학생의 경우 태생적 혐오를 감추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 이 아이도 그렇지 않을까. 

그러나 내가 이 모든 생각을 그 짧은 순간에 한 건 아니다.

사실 난 우발적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이나 판단력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다.

따라서 많은 연습이나 훈련을 통해 긴급 상황에 대처하는 방법을 더 선호한다.

그렇기에 솔직히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이가 죽인 거미도 징그럽고, ‘그냥’ 거미를 죽였다는 아이를 보기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용케 스쳐 들었던 연수의 내용을 기억하며, 아이들이 일으킨 상황에 대해 스스로 대처하고 처리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면 이건 네가 이렇게 한 거니까 네가 마저 치우자.”

“여기서요?”

“응.”

“저 아무것도 없는데요? 휴지나 뭐…”

“바로 옆 선생님 반에 휴지 있어.”

“네.” 


아마 연수에서는 아이들의 문제해결력과 사고력이 증진하고 책임감을 키울 수 있다고 했던 거 같다.

그렇게 휴지를 건네주며 나름대로 쓸모 있던 대처로 나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끼고 있던 찰나, 아이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저……. 그런데 저 이런 거 못 잡는데요?” 


순간 머리가 새하얘진다. 너도 그렇니? 나도 그렇단다. 너는 모르겠지만, 아내와 연애할 적 어깨에 있던 무당벌레 날갯짓 소리에 흠칫 놀라 한걸음에 5미터 정도는 훌쩍 뛰며 소스라치게 놀라 일주일 내내 놀림 받던 나란다. 하아, 네가 그렇게 찰진 소리로 때려잡아 놓고서는 나에게 왜 이런 시련을 주는 거니. 하지만 차마 속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다시금 휴지를 한껏 더 뽑아 왔다. 


“너 이거 잡지도 못하는 거야? 징그러워서?”

“네.” 


나는 몇 장 뽑았는지 모를 두툼한 휴지로 처참하게 짓이겨진 거미의 사체를 감쌌다.

팔뚝에 소름이 돋고 심장이 멎는 듯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럼, 이렇게 했으면 안 되지. 네가 그렇게 생각하면 지나가는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아, 그렇네요.”


'이놈아 나도 그렇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오는 원초적 공포가 스멀스멀 기어나온다.

나도 벌레가 무섭다고 아이에게 솔직하게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교사의 체면이 있지, 절대 그럴 수 없었다.

<방충망에 매미 좀 날려 줄 친구, 손!ㅠㅠ>

나는 애써 침착한 척하며 아이에게 말했다.


“그리고 거미도 살아있는 생명체이잖니. 우리 반대로 생각해 보자. 사람보다 훨씬 커다란 거미가 그냥 너를 봤다는 이유로 막 짓밟으면 마음이 어떻겠니?”


순간 머릿속에 아내와 같이 봤던 ‘진격의 거인’이라는 애니메이션이 떠올랐다. 그래. 그 진격의 거인처럼 말이야. 얼마나 끔찍해. 나는 아이의 입에서 억울하다, 혹은 분하거나 슬프다 등의 단어가 나올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아이는 달랐다.


“어, 잘 모르겠어요.”

“그래. 뭐 잘 모를 수도 있지. 그런데 억울하지 않을까? 거미는 그냥 자기가 가던 길 가는 것뿐이었잖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렇게 나는 그 남자아이와 이야기를 짧게 나눈 후 돌려보냈다.

어쨌든 집에 가야 하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아이가 집에 간 후 내가 했던 비유를 다시 떠올려보며 후회했다.

거미와 아이의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게 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비유를 잘 못 든 것 같다.

커다란 거미의 상황 대신, 아무 이유 없이 길 가던 중 선생님에게 혼나는 상황에 비유했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부모님께 혼나는 상황은?

아이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이유는 그럴 상황을 상상하지 못해서이다.

애초에 거미가 본인보다 클 일이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의 또 다른 잘못은 질문의 범위가 너무 넓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 저학년, 혹은 그 이하 연령의 아동들에게 ‘개방형 질문’을 하면 대부분 어려워한다.

여기서 개방형 질문이란 답이 딱히 정해지지 않은 서술형 질문을 뜻한다.

이는 특수교육대상자도 마찬가지다.

다수의 특수교육대상자가 장애를 가진 아동이기 때문에 지적인 부분에서 어려움을 보인다.

그렇기에 ‘개방형 질문’보다는 ‘폐쇄형 질문’을 통해 답을 유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여기서 폐쇄형 질문이란 객관식처럼 여러 선택지를 주는 등의 질문을 말한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오늘 만들기 뭐가 좋았어요?’라고 물으면 그저 ‘네’, ‘아니오’ 혹은 ‘그냥 좋았어요’라고 대답하는 아이가 대다수일 것이다.

이는 개방적 질문에 속한다.

하지만 ‘오늘 만들기는 좋았어요?’라고 물은 후, ‘네’라고 대답한 아동에게 ‘다 만들어 놓은 작품이 멋져서 좋았어요? 아니면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어서 좋았어요?’라고 묻는다면 이는 폐쇄형 질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마 가정에서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어땠어?’일 것이다.

이를 묻는 부모는 이러한 것이 좋고 저러한 것이 안 좋았다는 등의 구체적인 대답을 원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성인의 입장으로만 쉽고 아이들의 생각에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그리고 남자아이에게 역지사지의 입장을 강요하던 내가 그랬다. 


꽤나 오랫동안 교직 생활에 몸담았다고 생각하지만, 아직 머리로는 알아도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나오기까지가 어렵다.

하지만 뭐, 언젠가는 되겠지.

나는 태생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긍정적 낙천주의자로 자랐다.

이 글을 스쳐 읽는 사람 모두가 자기에게 실망하고 후회하더라도 꼭 나처럼 생각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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