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었다. 오가는 새해 인사 속에, 취직 소식을 가장 먼저 들었던 선배의 연락이 남달랐다.
‘취직하고 나서 맞는 새해는 기분이 어떨까? 취직이 확정됐다며 기뻐하던 너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나. 참 좋아했었지. 그래도 힘들었지? 올해에는 좋은 일만, 행복한 일만 있을 거야. 새해 복 많이 받아!’
답장을 보내고 다시 답장을 받으며 알게 된 선배의 근황은 올해 워킹홀리데이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회사 일은 익숙해졌냐고 묻기에, 익숙해지긴 했지만 어려움도 있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사수가 존경할 수 있는 분이라고 답했다. 그에 대해 선배는 ‘좋은 사람 곁에는 좋은 사람만 생기는 법이지’라고 좋은 말을 보내주었다. 장난 삼아 ‘좋은 사람 여기 하나 더 추가요!’라고 썼다가 바로 지우고는 한동안 선배의 메시지를 반복해서 읽었다.
회사 자체적인 연말연시 연휴 이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야근이었다. 연휴 전에도 야근, 후에도 야근. 이래서는 연휴가 의미가 있는 걸까 생각하며 바쁘게 서류를 체크하고 이메일을 썼다. 연휴 나흘째부터는 비로소 시간 개념이 없어져 무심코 시계를 봤더니 밤 9시였다. 아직 한 시간은 더 앉아 있어야 했다. 이런 날이 이어지면 6시에 퇴근하는 것이 찝찝하게 느껴질 거란 생각이 엄습했다. 퇴근 후 내 시간을 갖던 것이 머나먼 과거 일처럼 느껴졌다. 담당하는 업체 이곳저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고 악천후로 선적 일정이 꼬이고 번역할 자료도 쌓이는 등 업무량이 몰리고 있었다. 그렇게 2주 정도 지났을 때 몸에 이상 신호가 왔다. 저녁을 거르거나 늦게 먹으면서 면역력이 떨어졌는지 몸이 으슬으슬하기 시작했다. 하루 휴가를 쓰고 쉰 다음날, 상태는 오히려 악화되어 아침에 일어나니 고열로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하루 더 쉴까 고민했지만 어제도 쉬었고, 조만간 외할머니 팔순으로 쉬어야 할 것 같아 뼈마디가 쑤시는 걸 참으며 쌀을 불려 죽을 끓였다. 몸에 힘이 없어 조리대를 짚고 서서 눈물을 닦으면서도 죽이 눌어붙지 않도록 뚝배기를 연신 저어댔다. 서러운데도 어떻게든 먹고자 하는 이 의욕은 대체 어디서 솟아오르는 것인지. 내 처지에 울다가 내 의지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래도 고열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나마 몇 숟갈 들어간 게 있어서 힘이 났다. 회사에 가서 멀쩡히 건강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나란히 앉아 일을 하니 오히려 아프다는 느낌이 줄어들었다. 비록 눈, 코, 귀 등 모든 구멍에서 불을 뿜는 듯한 느낌이 나고 마스크를 한 탓에 입 주위 안면은 불구덩이처럼 뜨거웠지만, 정말로 집에 있는 것보다 이 편이 낫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픈 걸 걱정해 주는 동료들, 남은 일 주고 가라며 단호하게 말하는 선배들. 내가 언제 무슨 덕을 많이 쌓아서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것일까. 고열로 데워진 눈에서 눈물이 나니 뜨거워서 고통스러웠지만 마스크 안쪽에서 남몰래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행복하구나.
요 며칠 집에서는 할머니가 걱정하실까 봐 아픈 티를 내지 않고 있다. 비록 방 안에서 TV를 보시거나 주무시더라도 할머니가 집에 함께 계시다는 게 참 기분이 좋다. 든든하고 따뜻하다. 야근을 하고 오든 칼퇴를 하고 오든 저녁은 먹고 왔냐고 꼭 물어보시고는, 매번 더 잘, 더 많이, 더 든든히 먹으라고 한소리 하시는 할머니께 감사할 뿐이다.
*
주말이 되니 언제 아팠냐는 듯 몸이 가벼워졌다. 단지 안에 열린 장에 다녀온 할머니가 주황색 과일을 장바구니에서 꺼냈다.
“너 자몽이라는 거 먹어본 적 있니?”
“음료수로는 많이 먹어요. 그런데 자몽만 따로 먹은 적은 별로 없어요.”
“나는 처음 먹는데 맛있는 거니?”
“좀 쓴 맛 나요.”
자몽을 씻어 과도로 반을 나눈 할머니는 “히익! 무슨 껍질이 이렇게 단단하고 두껍냐?”며 입술을 비틀었다. 과육을 도려내어 입에 넣은 뒤에는 “으엑!”이라고 하며 뱉을 기세였다.
“이게 대체 무슨 맛이라니? 아우, 셔! 시고 쓰고, 사람들 이걸 왜 돈 주고 사 먹는 거냐.”
내가 오물오물 계속해서 집어 먹자 할머니는 내가 공중부양이라도 한 듯 신기해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너, 이게 맛있냐?”
“그렇게 맛있지는 않은데, 그래도 쓰고 신 게 먹을 만하네요.”
“엄멈머머, 웬일이래.”
할머니는 아직 씻지도 않은 튼실한 열매들을 근심 어린 눈으로 훑었다.
“이것들 너 혼자서 다 먹을 수 있겠냐?”
“왜요? 할머니도 같이 드셔야죠.”
“아니, 난 못 먹겠어서 그래.”
“무슨 말씀이에요? 드시다 보면 맛있어질 거예요.”
“아냐, 너 다 먹어. 난 안 먹을래.”
“할머니가 모처럼 사 오셨는데. 같이 드세요.”
“안 먹는대도 그러네. 맛이 없다고!”
할머니는 자몽을 툭 손으로 건들곤 나를 쳐다봤다.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앉아있는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할머니는 부스스 일어나 자몽을 하나하나 냉장고로 옮겼다,
“저 칸에 넣어놨으니까 네가 부지런히 씻어 먹어라. 알겠지?”
“네. 근데 저 혼자 다 먹기는 좀 죄송한데.”
“거 참!”
할머니는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질렀다가 의자를 빼고 다시 옆에 앉더니 얼굴을 가까이 내밀었다.
“싸우니까 정들고 좋다.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