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히 난방이 된 사무실에 바쁜 타이핑 소리와 프린트기 돌아가는 소리, 전화벨 소리, 통화 소리가 잡다하게 섞여 울렸다. 점심시간만을 기다리며 급한 서류 체크와 번역 작업을 마치고 이메일 창을 띄웠는데, 용건으로 점철된 제목들 사이로 남다른 제목이 보였다.
엘사&안나
보낸 이는 두 칸 옆 자리인 권 차장님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다른 메일보다 먼저 그 메일을 열어 보았다. 딱 한 줄의 글과 함께 사진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렇게 그림 잘 그리고 싶다~
파일을 열어보니 영화 <겨울왕국>의 포스터가 종이 위에 연필로 그려져 있었다. 잘 그리긴 정말 잘 그렸는데, 이런 걸 업무 시간에 메일로 보내신 차장님의 행동에 웃음이 터질 듯해 손으로 입을 막아야 했다. 더 웃긴 건, 우리 부서에서 부장님을 뺀 모든 인원에게 메일이 뿌려졌는데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누가 반응 좀 해주면 좋으련만 부서 전체가 합심을 한 듯 고요하기만 했다. 나라도 답장을 쓰자 싶어서 한 줄 간략한 메일을 보냈다.
누가 그리신 거예요?
‘대학원 동기’라고 바로 답장이 왔다.
점심식사 후 회사로 들어오는 에스컬레이터에서 같은 부서 연지 언니가 말을 꺼냈다.
“지금 와서 얘긴데, 너 아까 답장 보냈니?”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폭소를 참고 있는 언니의 눈빛을 보고 권 차장님 얘기라는 걸 알아차렸다.
“네. 누가 그렸는지 물어봤어요.”
“아, 진짜? 나 그때 서류 다섯 세트로 만들고 있어서 정신없는데 메일 와서 뭐지 하고 열었더니 진짜 못 말려.”
권 차장님은 그 뒤로도 기프티콘을 받는 이벤트 번호를 돌리거나, 뜬금없이 책을 추천하는 등 업무와 상관없는 메일을 부서원들에게 뿌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 점심시간을 앞두고 또 정신없이 메일 체크를 하는데 짧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초등시상
역시나 발신인은 권 차장님. 무슨 제목인지 감이 안 잡혔는데 클릭해 보니 아무 내용도 없고 첨부파일만 하나 있었다. 파일을 열어보니 문집의 어느 페이지를 찍은 사진이었다.
<안 아프다 >
나는 그 애만 보면
무조건 놀린다.
아니면
무조건 때린다.
그러면 그 애도 나를 때린다.
그때는 아프지가 않다.
-장곡초 5학년. 홍승기
제법 대단한 시에 감탄하여 다시 읽어 보았다. 입꼬리가 올라가고 이곳이 사무실이라는 것을 잊고 잠시 초등학교 시절의 교실에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그때의 교실 냄새가 훅 풍긴 것 같은 기분까지 들었다. 그 뒤 곧바로 이곳은 사무실이고, 이 메일을 받았을 다른 사람들을 떠올리자 폭소가 나올 뻔했다. 이번에도 부장님 빼고 부서원들이 받았는데,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모니터만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업무 중 난데없이 어린 소년의 풋사랑을 담은 시를 강제로 읽힌 사람들. 아무 일도 없는 듯 일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웃겼다. 이 웃긴 상황을 어떻게 참아야 할지 몰라 입술을 앙 물고 다른 업무 메일을 클릭했다.
점심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이윽고 권 차장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대체 그런 건 왜 자꾸 보낸다니?”
선 과장님은 밑반찬을 야무진 젓가락질로 집으며 말했다. 언니들도 웃으며 동조했다. 유연 선배가 내 손목을 붙들었다.
“기유, 설마 답장 한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안 했는데, 저번에 겨울왕국 그림 왔을 땐 했어요.”
“야아, 안 돼!”
선 과장님이 테이블을 짚고 이쪽으로 넘어올 기세로 소리쳤다.
“그런 황당메일에 반응하면 안 돼! 재밌어서 또 보낸단 말이야.”
“그거 다들 반응 안 하시던데, 저는 아무도 반응을 안 하는 그 상황이 더 웃겨요. 그나저나 누가 한마디라도 반응해 드리면 좋을 텐데.”
“웃기긴 무슨. 기유 씨도 반응하지 마.”
다들 조금씩 웃는 가운데 유연 선배가 말했다.
“권 차장님이 기유를 잘 챙기시니까 기유 씨도 가만있기가 그렇겠죠. K사 일도 같이 하고 있고. 그리고 아직 어리잖아요.”
선 과장님은 주문한 음식이 나와 몸을 뒤로 빼 공간을 만들면서 말했다.
“예전에 차장님이 실수로 회사 전체인원 주소로 그런 메일을 보낸 적이 있어. 다른 부서에서 그거 보고는 ‘그 부서는 할 일이 없나 봐?’라고 놀리고 말이야. 망신당했었어.”
이제야 부서 사람들이 하나같이 냉랭하게 무반응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다 한들, 차장님께 재미있다고 굳이 말할 것까진 없어도 피식하고 웃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라도 좋지 않을까?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모두가 욕할 짓도 마냥 재밌다고만 생각하는 걸까? 이상한 기분으로 눈앞에 놓인 음식을 쳐다봤다.
*
할머니께 이야기를 들려드리자 이메일이라는 개념도 곧잘 이해하시고는 “그 양반도 참”이라며 부서 선배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저는 그래도 그런 황당한 메일 보고 웃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재미있어서 웃든 어이없어서 웃든 좋지 않아요? 그런 거 없으면 일하면서 웃을 일이 거의 없거든요.”
“그러니? 그런 거 보면 네가 아직 어리긴 어린가 보다.”
부서 선배와 같은 말을 하셔서 정곡을 찔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눈치가 없고 마냥 낙천적이었나 보다. 가만히 국물을 떠먹고 밥을 뜨려는데 할머니가 덧붙였다.
“그 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너 예뻐하지?”
할머니는 여든에 걸맞은 ‘연장자의 얼굴’로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자잘하게 챙겨주시긴 해요.”
“그래. 재미있는 거, 좋은 거 여러 사람과 나누고 싶은 사람인 것 같은데, 아무도 반응 안 하는 것도 좀 그렇지. 찐기유가 잘하고 있는 거야.”
갑자기 입맛이 돌았다. 삭막한 사무실에 황당한 폭탄 메일을 하나씩 투척하는 권 차장님을 재미있다고 생각해도 되는지 의심이 들었었는데, 할머니의 말과 표정에 그렇게 생각해도 좋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내 생각을 지지해 주는 사람 한 명 있다는 것에 기뻐하는 걸 보니 아직 어린 게 맞긴 한가 보다. 그래, 그런 걸 반기지 않는 사람들도 분명 있지만, 딱히 크게 시간을 빼앗는 것도 아니고 숨 쉴 구멍 하나 내주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할머니와 눈을 맞추고 서로 웃어 보였다.
*
긴 하루를 보낸 뒤 퇴근길,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게이트를 통과하니 같은 부서 민 대리님이 가까이 다가왔다.
“대리님 계셨어요? 오늘 H사 회식 가신다고 하셨죠?”
“예. 기유 씨 사는 동네죠. 할머니랑은 잘 지내요?”
H사가 내가 사는 동네에 있었던가? 직선거리로 따져 보아도 1.5킬로미터는 떨어져 있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도 민 대리님은 상냥한 미소를 띠우고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술상무로 전쟁터에 나가는 와중에도 할머니와의 안부를 물어 주시는 대리님이 참 감사했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그래요.”
민 대리님은 잠시 흐뭇하게 웃다가 말했다.
“참 대단해요. 친할머니도 아니고 전혀 모르던 분이라고 했죠? 대화도 하고 그래요?”
“네, 매일 저녁 먹으면서 대화해요. 할머니도 대화하는 거 좋아하는 분이세요.”
“기유 씨가 잘 들어 드리나 보네.”
“저도 얘기 많이 해요. 할머니도 잘 들어주세요.”
“기유 씨가 잘 들어 드리니까 그러지. 권 차장님도 기유 씨랑 대화하는 거 좋아하시잖아요.”
“아, 하하, 그래요?”
“어릴 때 할머니랑 지낸 적 있어요?”
“아뇨, 아예 없어요.”
“기유 씨는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얼마 더 같이 걸은 뒤 민 대리님은 정장 재킷을 든 손을 높이 들며 작별 인사를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민 대리님도 권 차장님의 메일에 아무 답을 안 했을까? 하여간 권 차장님도 참. 다음엔 어떤 메일을 뿌리실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