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시작

by 진기유

어린이날도 지나고 어느덧 달력이 절반으로 넘어갈 시기가 다가왔다. 업무도 익숙해졌고, 최근 며칠간 내가 담당한 수출 업무의 선적이 뜸하고, 수입 건도 특별한 이슈가 없어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근무하는 여덟 시간이 참 길게 느껴지는 날이 이어졌다. 지금도 서류 작성, 통관 업무, 번역 업무, 고객사 방문 호텔 예약 등 할 일을 다 끝내서 정말로 더 이상 할 게 없어 하릴없이 시계만 보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업데이트하는 시황 자료도 더 이상 업데이트 할 것도 없다. 조금 용기를 내어 네이버에 들어갔다. 입사 때부터 지금까지 부서 내 많은 사람들이 짬 날 때 온라인으로 쇼핑을 하는 걸 봤었기 때문에 이 정도 웹 서핑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조금 전 옆자리 유연 선배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온라인 쇼핑몰을 보고 있었으니, 안심을 하고 실시간 검색어를 눌러보았다. 세 번째 검색어를 눌러서 보고 있던 중, 등 뒤로 유연 선배가 지나가며 “지금 뭐 하는 거야?”라고 작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창을 내린 뒤 멋쩍어하며 선배를 쳐다보자 “한가한 건 알겠지만 인터넷은 하지 마.”라고 한소리를 들었다. “네.”라고 대답한 뒤 멍하니 아까도 세 번은 읽은 듯한 이메일을 열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자 하나씩 불만이 피어올랐다.

지금까지 유연 선배가 웹 서핑이나 온라인 쇼핑을 하는 것을 얼마나 많이 봤던가? 아까까지 본인도 하지 않았나? 그리고 ‘한가한 건 알겠지만’이라고? 내 담당 업체가 순풍 바다같이 조용했던 적이 지금껏 없었는데 적어도 ‘지금’이라는 말을 앞에 붙여줬다면.

이내 부서 막내라는 신분을 되새기며 불만을 가라앉히고 새로 들어온 메일을 읽고 있는데 유연 선배가 다시 말을 꺼냈다.

“바로 앞에 연지 씨도 인터넷 안 하는데 말이야.”

고개를 돌려 선배를 쳐다본 뒤, 선배와 마주 앉은 연지 언니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에는 결재받으러 부장님 자리에 가던 길이나 화장실을 다녀오던 길에 보았던, 연지 언니가 새로 출시된 커피전문점의 텀블러나 블로그를 보던 숱한 모습들이 플래시백 되었지만 심호흡을 하고 모니터로 눈길을 돌렸다.


몇 주 전에 선 과장님과 연지 언니가 근무시간 중 한 시간이 넘게 자리를 비웠던 적이 있었다. 연지 언니를 찾는 전화가 걸려온 걸 대신 받았을 때 시간을 봤었다.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언니는 여전히 자리에 없었고, 시간은 한 시간을 넘어가고 있었다. 전화를 걸었던 사람도 ‘도대체 어딜 간 건지 아느냐’고 재촉했다. 이윽고 돌아온 언니와 선 과장님의 손에는 600미터 떨어진 백화점에 입점해 있는 매장의 캐릭터 상품이 종이봉투 한가득 들려 있었다.

“언니, 한 시간 넘게 어디 가셨었어요? 지금 언니 찾는······.”

“한 시간? 한 시간은 아니다, 야. 4시 몇 분에 나갔거든?”


그 당당한 표정과 말투가 저절로 떠올라 숨이 확 차올라 다시 심호흡을 하며 평정을 유지했다. 유연 선배는 그때 선 과장님과 연지 언니 옆에 서서 매장에서 찍은 사진을 함께 보며 웃으며 대화를 했었다. 이제 궁금해진다. 만약 내가 근무시간 중 한 시간 넘게 자리를 비우고 캐릭터 상품을 잔뜩 사들고 왔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그때였다.

“연지 씨 인터넷 하는 거 본 적 있어? 없지?”

유연 선배는 상체를 틀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있다고 대답해버릴까 싶었지만 바보같이 참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지? 그런데 왜 너는 하는 거야?”

잠시 뒤 둘은 서로 주고받듯 정확하게 시작과 끝을 주고받으며 키보드를 두드렸다. 누가 보아도 서로 메신저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유연 선배가 타이핑을 멈추고 소리 내어 말했다.

“연지 씨, 연지씨는 네이버 연 적 있어?”

“네이버요? 아, HS코드 찾을 때? 근데 그때도 되게 막 누가 볼까 봐 막······.”

“눈치 봤어?”

“네.”

연지 언니는 키득거렸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저렇게 웃으며 할 수 있다니 소름이 끼칠 정도로 놀라웠다.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일 잘하고 눈치 빠르고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던 연지 언니였는데, 저게 본래 모습인 것일까? 그나저나 회사는 역시 학교와 달라서, 학교였다면 내가 이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가 없는 성격인데 회사라서 혹여 싸움으로 번질까 봐 입을 다물게 되는 게 스스로도 신기했다. 고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이 반 전체에게 해주셨던 말이 떠올랐다. 아니, 7년 전 기억의 저편에서 어떻게든 끌어올렸다는 게 맞겠다.

“살다 보면 내가 뭘 어찌할 수 없는 억울한 상황에 처할 수 있어. 그런 경우 나는 ‘사필귀정’을 되뇌지.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뜻이야. 성을 낼 필요도 없고 전전긍긍할 필요도 없어. 누가 옳고 그른지 결국 모두가 알게 돼. 살아보니 정말 사필귀정으로 세상일은 흘러가더라고.”

‘선생님, 믿습니다. 믿어 보겠습니다.’

조용히 심호흡 후 주먹을 살짝 쥐었다 펴고 업무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퇴근하는 길, 최근 승진하여 과장이 된 같은 부서 장 과장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물었다.

“오늘이 목요일, 기유 씨 왜 학원 가는 날 아닌가? 오늘은 왜 악기가 없어?”

“화요일에 비가 많이 와서 학원에 놓고 왔어요. 어떻게 기억하세요?”

“기억하지!”

대리님은 사람 좋은 미소를 띠웠다. 작년 말부터 배우기 시작한 악기가 있어, 회사 근처 학원에 화, 목으로 다니고 있었다. 수업이 있는 날은 악기를 들고 출근을 하는데 어쩌면 요일까지 기억하실 줄이야.

“그래서, 센세(선생님)랑은 잘 돼가?”

이미 여러 번 들은 얄궂은 농담이었다. 여자 선생님이라고 매번 대답했는데도 그때마다 “시라나이(몰라)”라고 무시하고는 또 똑같이 반복된다. 이제 패턴을 바꿔 볼까.

“네, 뭐 잘 돼가요.”

대리님은 크게 웃었다.

“나는 대학 때 밴드에서 드럼을 했었는데, 이제는 좀 때리는 악기 말고 피아노 같은 걸 배워 보고 싶어.”

“제가 다니는 학원에서 피아노 레슨도 있어요.”

“그래? 어딘데?”

한바탕 장 과장님과 대화가 끝난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나가는 게이트를 통과한 찰나, 함께 내린 소미 언니가 살며시 팔을 붙들었다. 장 과장님은 잠시 우리를 번갈아 보고는 먼저 간다며 앞서 걸어갔다.

“기유 씨, 뒤에 약속 있어?”

“아뇨?”

소미 언니의 안색을 살폈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 듯했다.

“잠깐 저기 벤치에서 얘기하고 갈래?”

벤치에 앉자 언니는 내 팔을 쓰다듬듯 붙들었다.

“아까 대화 들렸어. 기유 씨 힘들까 봐. 그런 거 마음 쓰지 마.”

순간 장 과장님 얘기인가 싶었지만 그게 아니라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란 걸 알아차리고 괜찮다는 뜻으로 미소를 지었다.

“요즘 선 과장님이랑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저번에는 L매장 갔다 온 것 같던데.”

“네, 그때 한 시간 넘게 H사에서 찾았었어요.”

“나한테도 다른 데서 연지 씨 찾는 전화 왔었어. 연지 씨도 사람이 좀······. 일은 잘하긴 하는데 아까 보니까 말이 안 나오더라.”

소미 언니는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언니, 그것 때문에 일부러 이렇게······. 아까 진짜 힘들었어요. 이렇게 말해주셔서 눈물 날 것 같아요.”

소미 언니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분위기를 바꿨다.

“하여간 너무 마음 쓰지 말고, 학원 가서 스트레스 잘 풀고.”

“정말 감사합니다.”

헤어지고 학원을 향해 걸어가는데 정말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째서 바늘로 찔리고 있을 때에는 꿈쩍도 않는 마음이 저런 부드러운 마음에 허물어지는 걸까. 어쩌면 공평하게도 상처 주는 사람이 있으면 상처를 보듬어 주는 사람도 곁에 있는 것일까. 그런 세상 이치에 감사한 마음을 품으며 빠르게 발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아직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회사에서의 스트레스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평소였으면 대수롭지 않았을 것에도 얼마나 예민하게 되는지, 그것이 할머니와의 생활에도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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