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꼭 다문 입술을 살짝 열어 숨을 내뱉어 보았다. 새까만 밤하늘 아래 따뜻한 빛을 내고 있는 가로등빛에 새하얀 입김이 비쳤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를 지나, 아파트 1층 현관을 지나, 11층에 내렸다. 또각또각, 굽이 높지도 않은 구두가 복도에 시끄럽게 발소리를 울렸다. 드르륵, 열쇠를 꽂고 돌려 낡고 얇은 현관문을 여는 그 순간이 나의 진짜 하루의 시작인 듯한 기분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도 언 뺨이 녹을 듯한 따뜻한 기운은 없다. 지역난방이라서 바닥이 따뜻한 걸 본 일이 없다. 그저 냉바닥이 아닐 정도로만 유지가 되었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는 순간은 기분이 좋다. 내 시간, 내 공간,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다녀왔습니다.”
“왔니?”
슬리퍼가 칙,칙 끌리는 소리와 함께 할머니가 TV방에서 나왔다.
“요즘 좀 늦다? 일이 많니?”
“네, 연말에 회사가 연휴에 들어갈 거라서 일을 미리 다 끝내 놔야 해서 좀 몰리고 있어요.”
“연휴? 며칠 쉬는데?”
할머니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답하며 거실과 방을 오가며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었다. 할머니는 또 집에 내려갔다 올 거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말했다.
“왜 그리 자주 가?”
놀라서 안색을 살폈는데 역시나 진지한 표정이다. 입술이 삐죽 나와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당황해서 어색한 웃음을 짓고 있는데 할머니가 식탁 의자에 얹어 둔 검정 비닐봉지를 손에 들었다.
“자.”
봉지 안에서 꺼내 내게 내민 것은 수면양말과 수면신발이었다. 양말은 흰 바탕에 고양이의 눈코입이 수놓아져 있고 양말목에 연갈색 삼각형 귀가 달려 있었다. 수면신발은 양털 같은 흰 안감이 있고, 겉감의 검은색 바탕에는 귀여운 해골 무늬가 다양한 색깔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사자 슬리퍼에 이어 놀라운 센스에 감탄하며 선물을 받아 들었다.
“감사합니다. 이건 갑자기 왜······.”
“나갔다가 보이길래 샀어. 메리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눈썹을 삼각형으로 치켜뜨며 물었다.
“왜, 별로야?”
“아뇨! 너무 귀여워서요. 할머니 이런 귀여운 거 좋아하세요?”
“그거 귀엽냐?”
여느 때처럼 식탁을 사이에 두고 직각으로 붙어 앉아 각자 취향대로 차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나는 낫또를 끼얹은 밥에 국, 반찬을 먹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할머니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왜 그러세요?”
“허허, 웃겨서.”
할머니는 손을 젓가락처럼 하고는 밥그릇과 입 사이에서 빠르게 회전하는 동작을 흉내 냈다. 낫또에서 나오는 줄을 제거하려고 한입 먹을 때마다 내가 하는 동작이었다.
“먹을 때마다 참 바쁘십니다.”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할머니가 말했다. 함께 웃은 뒤 다시 묵묵히 식사가 이어졌다. 복도 저 멀리서부터 여러 사람의 발걸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멈출 기미가 없이 가까워지는 소리로 보아 오늘도 어김없이 제일 끝집인 옆집으로 가는 사람들이 온 듯했다. 우리 집을 지나는 도중에 두 아이와 두 어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는 숟가락질을 멈추고 소리를 따라 고개를 한껏 뒤로 돌리고는, 옆집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그대로 있었다. 다시 고개를 제자리로 하고 국물을 드신 할머니는 귓속말을 하듯 작게 말했다.
“저 집은 노부부 둘이 사는데, 주말마다 아들네가 저렇게 온다? 어떻게 저렇게 효자일까 그래?”
나도 반년동안 저 발소리를 들었는데 아들네가 주말마다 오는 것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냥 오는가 보다 싶었지 매주 이어지는 일인지 잘 몰랐다. 내가 무딘 건지, 할머니가 주변에 관심이 많은 건지.
“어쩜 저렇게 손주들 데리고 매주 오는지 모르겠어. 아주 부럽다니깐?”
“부러우세요?”
“부럽지 그럼! 요즘 저런 효자가 어디 흔하니?”
“며느리도 언급해주셔야죠.”
“응?”
“아들도 효자고, 며느리도 효부라고요.”
할머니는 난처한 기색이 어린 웃음을 보이며 “아아, 하하하.”하고 웃었다.
“그렇지. 며느리가 아주 대단한 거지.”
“저렇게 오면 밤중에 가요?”
“아니, 항상 자고 가. 언제나!”
“흐음.”
할머니는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부럽다는 말을 하셨다. 내가 딸도, 며느리도, 손녀도 아닌 남이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 편하게 그 말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는 여든이 저토록 부러워하는 게 ‘가족’이라는 것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그중에서도 절대로 불가능한 게 가족이 아닐까. 그런데 나는 지금 할머니와 가족인가, 아닌가?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할머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밤에 양치하거나 물을 마시려고 방 밖으로 나가면 언제나 나보다 할머니가 먼저 잠자리에 들어 코 고는 소리가 들리곤 한다. 아니면 새근새근 숨 쉬는 소리, 방귀소리, 트림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기분이 좋다. 할머니는 TV방에서 TV를 볼 때도 전등을 안 켜고, 거실이나 부엌도 사람이 머물지 않으면 불을 다 끈다. 내방을 제외하면 캄캄한 그 집 안에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것, 그 사람이 건강히 자고 있다는 것에 안도감이 들곤 한다.
*
“할머니 선물이요!”
크리스마스가 지나긴 했지만 아직 겨울이 한창이다. 할머니께 내민 것은 수면바지다. 집에서 폭닥폭닥한 수면바지를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옅은 분홍빛 바탕에 흰 고양이 캐릭터 패턴이 있는 깜찍한 디자인으로 골랐다.
“뭘 옷을 사 와? 너 입지.”
“할머니 입으세요. 항상 춥게 입으시잖아요. 티셔츠도 얇고.”
“안 추워.”
“이 집이 따뜻하지가 않고 그냥 안 추운 정도라서 그 옷으로는 추워요 할머니.”
“너 입으라니까?”
“이미 입고 있어요!”
입고 있는 수면바지를 손가락으로 당겼다.
“하나 더 입으면 되지.”
“이미 몇 벌 있어서 돌려 입고 있어요.”
“나는 필요 없는데.”
“필요가 없긴요. 지금 그 바지 너무 얇잖아요. 이거 세탁기 돌릴 테니까 마르면 바로 입으세요.”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 할머니 이거 안 비싸요! 그냥 좀 받아 주세요.”
한참을 옥신각신 한 끝에 겨우 대화가 종료되었다. 그 뒤 할머니는 바지가 닳아 구멍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바지만 입으셨다. 빨래를 돌려둔 동안에는 얇은 내복바지로 연명하다가 수면바지가 마르면 곧바로 입으셨다. 필요 없다 하실 땐 언제고 저러다가 바지가 남아나지 않겠다 싶어,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에 두 벌을 더 샀다. 할머니는 역시나 또 괜한 짓을 했다며 펄쩍 뛰셨다. 바지를 더 사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각오했던 터라 한 귀로 흘리며 세탁기에 넣었다. 할머니는 뒷베란다에서 나와 방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불렀다.
“찐기유.”
“네.”
“너는 완, 투, 쓰리가 잘 되어 있어.”
“네?”
뭔진 몰라도 내 입가에 이미 웃음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검지를 까딱거리며 반복했다.
“완, 투, 쓰리가 아주 잘 되어 있다고.”
“완, 투, 쓰리요? 아하하.”
할머니의 표현법인가. 할머니가 느낀 그것을 다른 단어로 표현할 길이 없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