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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Sep 02. 2024

인연


지난 이야기: 자취방을 찾는 '나'. 원하는 조건과 금액을 충족하는 곳을 찾지 못하던 중, 큰 집에 방 한 칸만 세를 놓은 물건을 보게 된다. 집주인은 여든 살 할머니라는데···



역에 내려 큰 길가로 나오자마자 보이는 아파트. 노란색이었을 페인트는 색이 바래 낡은 티가 역력하다. 하지만 의외로 금이 간 곳이 보이지 않아 저만 하면 30년을 훌쩍 넘긴 아파트 치고 양호하다고 생각했다. 남쪽으로 트인 단지 입구로 향하는 길에 장바구니를 든 어르신이나 아기유모차와 스쳤는데,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동네가 주는 느낌에 마음이 편안했다. 단지 입구에는 연식에 걸맞게 숲처럼 울창하게 높은 나무들이 우거져 있다.


어제 공인중개사무소에 전화했을 때 들은 얘기로, 집주인은 혼자 사시는 여든 살 할머니이고 이전에도 세입자를 받아 본 경험이 있는 분이라고 했다. 어떤 할머니이기에 서울 중심지에 38평 집을 갖고 혼자 사시는 것인지, 자녀분들은 멀리 떨어져 지내는 건지, 집 상태는 어떨지, 외로워서 세를 놓으시는 건지, 생활비가 필요하신 건지 호기심이 줄줄이 일었지만 곧장 다음날 만나자는 약속을 잡고 통화는 끝났다. 그리고 어느새 이곳, 아파트 앞 상가에 엄마와 도착해 있었다.


상가의 좁은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공인중개사무소를 찾았다. 수수하고 차분한 인상의 중년의 중개사와 인사를 나누었다. 중개사는 “더운데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지금 할머니께 전화 한 번 드려볼 테니 앉아 계세요.”라고 하고는 바로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중개사 책상에 자리한 자기 연필꽂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녀분이 어릴 적 지점토로 만들었다고 추측되는 엉성하면서도 귀여운 모양이다. 원통 주변으로 꽃을 표현한 듯한 덩어리들이 붙어 있고 전체적으로 연한 색깔이 알록달록 칠해져 있다. 우리 집에 있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지점토 공예가 생각나며 중개사에게 묘한 친근감을 느끼고 있을 즈음, 통화를 끝낸 중개사가 호쾌하게 말했다.

“지금 바로 오셔도 좋다고 하시네요. 오늘 이 시간쯤 오신다는 거 할머니도 알고 계시거든요. 어떻게, 지금 바로 가보시겠어요?”

엄마는 긴장이 되는지 얼굴은 웃고 있지만 떨리는 목소리로 “예에, 예.”라고 수줍게 대답하고 일어섰다. 긴장이 되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몇 분 안에 만나는 것이다. 베일에 가려진 그 할머니를!

‘어떤 분일까. 인자하신 분일까, 심술궂은 분일까? 깔끔하신 분일까? 여든이라는 나이는 어떤 느낌이지? 우리 외할머니랑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사람마다 편차가 있으니까. 설마 내가 부축해야 하는 정도는 아니겠지?’

주어진 정보가 너무 없으니 상상할 수 있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호리호리하고 가녀린 모습일까, 덩치가 크고 걸걸한 모습일까.


중개사는 사무실 문을 잠그면서 물었다.

“근데 매물은 어떻게 보셨어요? 이 동네로 찾고 계셨나요? 워낙 좀 특이한 케이스라 어떻게 찾아보신 건지······.”

엄마는 칭찬을 들은 어린아이처럼 눈빛을 빛냈다.

“제가 옛날에 이런 식으로 방 한 칸 빌려서 지낸 적이 있거든요. 혹시나 해서 ‘방 한 칸’이라고 검색했더니 대학가 쪽에 몇 개 나오더라고요? 그중에서 얘 통근하기 좋은 지하철 라인이나 예전에 살던 익숙한 동네 찾다가 여기를 보게 되었어요.”

“그러셨구나. 아주 잘 보셨네요! 예, 이런 곳에선 보기 드문 케이스지요. 따님 직장은 어느 쪽인가요?”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하며 단지를 걷기 시작했는데, 그러고 보니 아직 내가 볼 집이 몇 동 몇 층인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모든 걸 편안하게 생각했던 것인지 좋은 의미로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라는 느낌으로 오늘까지 왔다는 걸 깨달았다. 좋은 예감이 들었다.

오래된 단지 특유의 자잘하고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여기저기 깨진 보라 빛 도는 분홍색 보도블록, 로켓모양 미끄럼틀과 뺑뺑이, 쇠사슬 그네, 쇠파이프 시소가 있는 놀이터···. 처음으로 발을 들인 단지였지만 어딘가에서 엄마가 끓인 된장찌개 냄새가 풍길 것 같은 편안하고 익숙한 느낌이 나를 받아줬다. 긴 복도식 아파트 정 중앙의 출입구에 들어서는 중 마침 화단 근처에서 일을 하던 경비아저씨와 중개사가 짧지만 살갑게 인사를 나눴다.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의 풀내음 나는 화단에서 경비아저씨는 나와 엄마에게도 환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이미 이곳에 사는 양 나도 반갑게 인사했다. 출입구는 앞뒤로 통하도록 개방적인 구조였고, 그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두 대 있었다. 구축 아파트 구조 중에선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홀이 으슥하지 않고 햇빛이 든다는 게 또 마음에 들었다.

“꼭대기는 12층이고, 할머니 집은 11층이에요.”

“좋네요.”

엄마는 이어서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구축이라 제일 윗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울 거야. 다행이다.”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타며 중개사가 부연 설명을 했다.

“여기가 오래된 아파트라 지역난방이에요. 겨울엔 좀 추우실 수도 있어요.”

문이 열리고 드디어 11층 복도에 발을 디뎠다. 몸을 트니 맞은편 동 위로 파란 하늘이 넓게 보였다. 높은 층에 서 있다는 실감이 확 났다. 가슴팍 정도 오는 흰 담벼락이 있는 긴 복도가 양쪽으로 뻗어 있었다. 아득히 멀리 아래쪽에서 어린아이가 친구의 이름을 호탕하게 부른 소리가 건물에 부딪히며 귀에 들어왔다. 한가로운 추억에 젖어들게 만드는 소리였다. 중개사를 따라 왼쪽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아마 우리를 맞이하신다고 현관문을 열어두지 않으셨을까 기대했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는 길에 있는 집들이 모두 현관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완전히 열린 현관문은 벽과 붙어 있었고, 뻥 뚫린 현관에는 방충망이 있었다. 각 집을 지날 때마다 고유의 집 냄새가 풍겨와서 기분이 좋았다.

“문을 다 열어놓고 사네요?”

“예, 여기 사는 분들은 여름 대낮에는 이렇게 많이들 지내세요. 외부인 바로 못 들어오게 경비아저씨께서 관리도 잘하시고요.”

중개사가 어느 집에서 멈출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이윽고 그의 발이 느려지더니 드디어 어느 집 앞에 섰다.

“할머니이, 저희 왔습니다.”

“예에, 예! 열고 들어오세요.”

하얀 방충망 너머 안쪽에서 걸걸하고 우렁차지만 우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짝 엇박으로 끄는 듯한 슬리퍼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중개사가 방충망을 도르르륵 열자 그곳엔, 하얗고 뽀얀 피부에 동그란 얼굴, 살면서 본 눈망울 중 가장 크고 초롱초롱한 눈을 가진, 키가 작고 덩치가 있는 예쁜 할머니가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나를 보는 할머니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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