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여든 살 할머니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집에 직접 찾아간 '나'. 두근거리며 들어선 현관 안쪽에는 웃는 얼굴로 맞아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마치 첫걸음마를 하는 아기를 보는 듯한 조심스러움이 담긴 기쁨의 표정. 할머니는 내게 존댓말로 인사를 해주었다.
한바탕 더위에 대해 논하며 인사를 나누고 할머니는 서둘러 다시 부엌으로 돌아가 분주히 움직였다. 수박을 내던 중이었던 듯, 조리대 위에는 썰린 수박이 있었고, 앞접시와 작은 포크에는 금방 씻었는지 물기가 맺혀 있었다. 엄마가 손을 거들려고 엉거주춤 할머니 옆에 서니 할머니는 정말로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 흠칫 비켜서더니 아주 우렁찬 소리로 “아휴, 아니에요! 방 한번 보고 오셔요.”라고 말하며 손사래를 쳤다.
한눈에 알아본 빈 방은 현관문과 가장 가까운 문간방이었다. 색이 바래고 군데군데 흠집이 있는 벽지와 복도에 면한 낡은 창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고, 노란 장판이 뒤를 이었다. 파인애플에 맞먹는 노랑에 마음속으로 경악하며 벽지, 창문, 장판 도합 60점을 감점했지만, 방 크기가 마음에 들어 10점을 올렸다.
“어떻게, 괜찮은 것 같으세요?”
중개사는 내 심중을 읽은 듯 ‘낡긴 낡았죠?’ 톤으로 웃었다. 집 안쪽으로 들어가 욕실을 보았다. 할머니는 안방에 딸린 욕실을 사용하니, 이곳은 나만 사용하면 된다고 했다. 공간은 널찍했고 벽에는 하얗고 작은 정사각형 타일이 붙어있다. 심지어 라디에이터도 있다. 옛날 화장실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모습에 안도했다. 남향인 거실은 창문 새시가 그나마 새로 바꿨는지 단열은 걱정 없어 보였다. 부엌도 리모델링을 했는지 흰색 조리대가 깔끔한 느낌이었다. 큰 냉장고와 김치냉장고 어느 쪽이든 편하게 쓰면 된다고 했다. 아무래도 집주인이 있으니 마음 놓고 구석구석 보기가 어려웠다. 손을 공손히 모으고 고개만 쭉 빼고 중개사의 손끝을 따라 눈길을 주는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왠지 불편하거나 껄끄러운 느낌이 들지 않고 알 수 없는 흐름에 모든 걸 맡긴 듯 마음이 편안했다.
할머니의 손짓에 우리는 갈색의 중후한 원목 식탁으로 향했다. 집에서는 전체적으로 가구점 냄새가 났다. 살짝 둘러보니 식탁, 서랍장, 소파, 거실 테이블 모두 중후한 색상의 마호가니 나무로 된 가구였다. 열린 안방문 너머로도 한쪽 벽을 꽉 채운 적갈색 가구들이 보였다. 연식이 느껴지는 가구들을 보니 여든 살 어르신의 집이라는 실감이 났지만, 그나마 마루가 밝은 색이라 집이 칙칙해 보이지는 않았다. 식탁 의자를 빼는데, 볼록하게 솟은 가죽 좌판 위에 뽀얗게 먼지가 앉아 있었다. 깜짝 놀라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는데 할머니와 엄마는 이미 앉아 있었고, 중개사는 나처럼 당황하여 그대로 서 있었다. 나와 눈빛을 교환한 중개사는 멋쩍은 웃음을 흘리고 의자를 도로 식탁으로 집어넣었다. 엄마는 엉거주춤 서 있는 나를 보고 왜 안 앉냐고 물었다. 할머니의 시선이 느껴져 입이 열리지 않아 손짓으로 좌판을 가리켰다. 엄마는 의자 위 먼지를 보더니 ‘그냥 앉아’하는 눈빛을 쏘았다.
“왜 그래요?”
할머니가 당장이라도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건네줄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물었다. 최면에라도 걸린 듯 곧장 의자에 앉아버렸다. 그래, 양념도 아니고 먼지인데 나중에 털어버리면 되지.
“사장님, 안 앉고 뭐 하고 계세요?”
“아, 저는, 그, 사무실에서 계속 앉아만 있어서요. 저는 좀 서 있겠습니다.”중개사는 나와 엄마에게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할머니는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짧은 웃음을 내뱉고는 수박을 권했다. 잠시 뒤 중개사는 할머니에 대해 간략히 소개했다. 이 집에 15년째 살고 계시다는 것, 걷는 데 조금 불편하시다는 것, 그 외에는 전화로 이미 들었던 내용이었다. 이어서 할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가 다리가 안 좋아진 건 한 5년도 더 됐어요. 이, 무릎 뒤가 당긴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빨리 걷지를 못해요. 그래도 외출하고 목욕탕도 가고, 장도 보고, 병원도 다니고 다 하고 있답니다, 허허. 아 병원은, 제가 심장 수술을 했었어요. 그 뒤로 계속 심장약을 먹고 있는데, 약 타러도 가고 진료도 받고 있어요.”
느리지만 음의 높낮이가 수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 노래하는 듯한 서울사투리였다.
“가족은··· 아이가 외국에서 결혼해서 살고 있어요. 음··· 그리고 남동생 네가 일산 쪽에 있습니다.”
할머니의 말이 끝난 후엔 내 소개를 했다. 나이는 몇이며, 지금 부모님과 사는 곳은 어디이며, 다니게 될 직장은 어디에 있는지. 할머니는 연신 나와 엄마를 번갈아보며 어딘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짓다가 “음” 하고 다시 말씀을 시작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정말 신기한 것이, 제가 부동산에 얘기를 해서 방을 내놓은 게 어제거든요. 그런데 그러자마자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여기 사장님께 전화가 오지 뭐예요? 내일 바로 방을 보러 오실 분들이 있다고.”
“방을 어제 올리셨다고요?”
엄마는 눈썹을 한껏 올리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예에.”
“제가 어제 인터넷에서 본 건데. 그럼 방 올리신 날 바로 본 거네요?”
중개사가 대답했다. “예, 그렇지요. 뭐 거의 올리고 한 시간도 안 지나서 전화 주신 거예요.”
우리는 모두 훈훈한 분위기로 웃었다. 잠시 다 같이 수박을 음미했다. 머릿속은 빠르고 복잡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 집인가? 정말 이 집으로 할 것인가? 여기라면 통근 때 버스로 곧장 가는 노선이 있고,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한 번 갈아타야 한다. 복도에 면한 방은 괜찮은가? 사람이 지나다니는데 무섭지는 않을까? 겨울에 춥지는 않을까? 아니 모든 걸 다 떠나서, 위생 상태는 어떨 것인가. 거실이나 부엌이나 바닥 청소는 되어 있는 것 같긴 한데 의자는 차마 생각하지 못하고 빠트린 걸까. 그때였다.
“오늘 계약금 드리고 갈까?”
놀란 내가 쳐다보자 엄마는 훗 하고 웃는다. “여기로 하는 거지? 더 생각해 볼 거 있어?”
눈을 굴리니 중개사와 할머니도 나를 쳐다보고 있다. 표정이 하나같이 편안하다. 이미 내가 여기서 지내는 게 기정사실화 되어 있는 분위기다. 내가 즉답을 안 하고 망설이자 할머니가 방 벽지는 새로 도배할 거라고 했고, 급기야 중개사가 ‘겨울에는 외풍이 있어 춥다’며 언제가 되었든 세입자를 받으려면 창문 새시는 바꾸셔야 할 거라고 할머니를 설득했다. 할머니는 방 창문 새시를 가는 비용이 어느 정도 되는지 묻고는 아주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흔쾌히 받아들이셨다. 보통 인테리어에서 새시가 비용 중 큰 비중을 차지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일사천리로 진행될 일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했다. 아까만 해도 50점이었는데 이로서 90점이 되었다. 다시 방에 가서 장판을 보았는데 새것인 양 흠집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흐음, 기분파 점수 매기기의 결과는 100점 만점에 110점이라는 엉터리 점수가 되어버렸다. 여기다가 위생 점수를 깎는다면 몇 점을 깎을 것인가? 전체적으로 청소는 되어 있는 것 같은데, 혼자 사느라 잘 사용하지 않는 의자는 어쩔 수 없이 놓치신 거라 생각하고 눈감고 넘어가는 게 맞는 걸까? 그래, 저 할머니는 혼자 사느라 또 얼마나 외로우시겠어.
다시 식탁에 돌아가 말했다.
“할머니는 저랑 같이 지낼 수 있으시겠어요?”
나만 빼고 모두가 웃었다. 할머니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예, 합격입니다.”
잠시 고민에 빠졌다. 조건으로 보면 이 집이 너무 좋지만 위생상태가 의심스럽다. 부엌이나 베란다, 욕실은 곰팡이 하나 없이 청결하다. 다른 곳도 먼지가 없다. 그래, 부엌 의자 정도 놓칠 수 있지. 이 집이 만약 내가 처음으로 둘러본 집이라면 선뜻 결정 못하겠지만, 인터넷으로도 매물을 수 없이 봤고 실제로 동네를 정해 돌아보기까지 했을 때 마음이 가는 집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경험했다. 일련의 고생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마음을 정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순식간에 진행되어, 보증금 300만 원 중 100만 원을 계약금으로 내고 이사 날짜 이야기까지 마무리되었다. 할머니는 엄마를 살갑게 쳐다보며 말했다.
“에휴, 귀한 딸 내보내 놓고 어디 마음이 놓이겠어요? 그래도 제가 안전하게 잘 데리고 있을 테니까 마음 놓으세요.”
엄마는 몸을 뒤로 재끼며 말했다. “어휴, 무슨 말씀을요. 얼른 좀 나가라 싶죠.”
“따님 보러 자주 오세요. 서울 오실 일 한 번씩 있으면 어디 밖에서 사 먹지 말고 여기 와서 식사해요.”
엄마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락 말락. 할머니가 쐐기를 박았다.
“제가 뭘 거창하게 차려 내거나 그러진 못하더라도요, 찬밥에 김치 하나만 먹더라도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낫지요. 안 그래요?”
엄마의 눈에 반짝 빛이 나더니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집에서 나온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중 중개사가 말했다.
“뒤에 털으셔야 될 것 같은데. 아까 의자에 있던 먼지 보시고도 앉은 거예요? 어휴, 저는 못 앉겠더라고요.”
우리 셋은 함께 웃었다. 집이 마음에 들도록 거짓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드러내놓고 솔직한 사람도 있었다. 이쪽에 마음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 엄마는 말했다.
“할머니가 찬밥에 김치 얘기를 하시는데, 아, 이분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마음 놓고 널 맡길 수 있겠다 싶더라.”
엄마로 말할 것 같으면 요리를 즐기지 않음에도 결혼생활 중 외식을 제외하고는 집밥을 단 한 끼도 거른 적이 없는 ‘끼니 철학’이 투철한 분이다. 그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지각과 아침식사 거르기 중 지각을 선택해야 한 적도 있었다.
엄마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아무 걱정 없이 너를 얼른 내보내겠으니, 가서 잘 사시오. 알겠지? 할머니랑 싸우지 말고.”
'할머니랑 싸운다니, 설마. 엄마는 참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하셔.'
그땐 정말이지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