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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Sep 16. 2024

이사 1


지난 이야기: 룸메이트를 구한다는 할머니를 직접 만나고 묘한 인연을 느낀 '나'. 망설임 없이 계약을 맺고 동거인이 되기로 한다. 



이부자리와 옷, 생필품들은 큰 박스에 담아 차에 옮겨 두었다. 어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지만, 이삿짐이 얼마 되지 않는 데다 아빠도 할머니께 인사드리고 싶다는 이유로 자가용으로 이사를 하기로 했다. 할머니가 밥솥은 자기 것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난생처음 밥솥도 골라 봤다. 밥솥을 쳐다보고 있자니 밥은 어떻게 해 먹고살까 걱정이 된다. 쌀밥만 있어서 될 일이 아니지 않은가. 반찬은, 요리는? 그간 정신없이 지냈던 반동인지 온갖 걱정거리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늦잠 안 자고 지각 안 하고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 이사한다고 부모님 힘쓰게 만드는 게 마음이 안 좋다, 회사 일은 잘 해낼 수 있을까. 


마침 대학교 때 친했던 선배한테서 서울 오면 밥 사줄 테니까 연락하라고 메시지가 왔다. 집 나가려니 마음이 싱숭생숭하다고 토로하며 선배는 처음 자취할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물어보았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이 네 자매잖아. 매일 왁자지껄하다가 혼자 살게 되었을 때 정적이 너무 싫었어.

-그랬겠네요. 어떻게 극복하셨어요?

-한참 힘들었어. 그래서 잘 때까지 라디오 들었다? 그리고 나는 서울에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더 외로웠던 것 같아. 이제는 혼자 사는 거 너무 좋아. 언니 외로울까 걱정되면 어서 와서 연락이나 하셔.


남들도 환경이 바뀌면서 싱숭생숭한 기분을 겪는다는 걸 확인받아 조금 안심이 됐다. 생각해 보면 나는 이미 밥 사줄 테니까 연락하라는 언니도 있고, 친척 언니도 있고, 연락 달라는 선배들이 또 있었다. 게다가 룸메이트도 있다. 얼마 뒤면 다른 친구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애정 어린 연락 한 통이 마음에 달달한 간식을 먹여준 것 같았다.



밤이 되자 떠나기 전 얼굴 보자며 근처에 사는 친구가 불러냈다. 고등학교 시절 홀로 가족과 떨어져 하숙 경험이 있는 친구였다. 함께 밤산책을 하며 내 고민을 들은 친구는 한참을 혼자 낄낄 웃었다.

“왜 그래? 나 웃긴 얘기한 거 아닌데.”

“얼굴은 엄청 심각한데 내용이 너무 사소해서.”

그러고도 벤치에 앉아 몸을 뒤로 젖히고 웃는다. 나도 옆에 앉아 친구가 진정하기를 기다렸다가 말했다.

“이준아. 너도 처음으로 가족하고 떨어져서 지내야 했을 때 전날 밤에 이렇게 힘들었어?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게 힘들어. 부모님이 같이 이삿짐 차에 싣는 모습도 죄송하고, 이 동네 떠날 생각 하니 벌써 그립고 쓸쓸해.”

“갑자기 되게 감상적이네. 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그랬던 것 같아. 앞으로 어떻게 하지 싶고, 부모님 보고 싶으면 어떡하지 싶었던 것 같아. 근데 나 봐 봐. 이제 그랬던 거 기억도 잘 안 나잖아.”

“응······. 그런데 또, 내일 그 집에 가서 이삿짐 다시 날라야 하고, 부모님이 또 같이 분주히 움직이실 거 아니야? 그거 생각하면 또 슬퍼.”

“그게 왜?”

“나 때문에 고생하시는 것 같아서.”

“크하하하. 남자 친구 없어서 슬프다는 줄 알았네. 부모님 힘드실까 봐 마음 쓰이면, 그 짐 너 혼자 다 나르게? 그게 더 슬프지.”

듣고 보니 그러네. 내가 웃자 이준이도 다시 웃는다.

“어떻게, 내가 따라가서 짐 옮겨 줘?”

놀리는 데 재미 들린 얼굴로 이준이가 보디빌더 포즈를 취한다. 웃겨서인지 고마워서인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얼른 훔쳤다.

“오늘 밤 편하게 자. 걱정은 내일로 미뤄버리고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자.”



이준이에게 씩씩한 미소를 보여줬건만, 지금은 새벽 3시. 잠에서 깼다. 평소에 한 번 잠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는 나로서는 당황스러웠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온 빛으로 어슴푸레 빛나고 있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왜 잠에서 깨지? 뭐가 불안한 걸까?’

그리고 천천히 나를 응원해 준 사람들의 말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새로 다니게 될 직장도 머리에 그려보았다. 면접에서 면접관으로 만났던 사람들은 아마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될 사람들이었겠지. 좋았던 면접 분위기를 다시 떠올려 보며 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할 생각을 하니 기대감이 차 올랐다. 룸메이트 할머니도 떠올려보았다. 딱 한 번 만났지만 할머니와 함께 사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는 아는데 몸이 자꾸 잠에서 깨는 건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저 최대한 긍정적인 쪽으로 생각하며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그나마 여름인 게 얼마나 다행이야? 만약 겨울이면 첫 출근길과 퇴근길이 모두 캄캄할 텐데. 밝은 아침과 밝은 저녁에 퇴근하면 기분이 좋을 거야.’


*


이사 당일, 1층 주차장과 11층을 몇 차례 오가고 얼추 이사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창문 새시는 마침 오늘 오전에 교체가 완료되었다고 한다. 벽지도 희고 깔끔해서 방은 아주 마음에 들게 변해 있었다. 할머니는 이사 와중에도 ‘집밥을 먹으라’며 지방에서 직접 공수했다는 한우를 내었다. 평소에 상표가 붙은 한우만 먹다가 지방 주소의 일반 운송장이 붙어서 온 한우가 제법 신기했다. 할머니는 그 고기로 미역국을 끓이려 했는데, 인원이 많아 양 조절을 하기 어렵다고 했다. 엄마가 요리를 자처했고, 옆에서 함께 서 있다 꾸벅꾸벅 졸게 된 할머니는 결국 안방으로 들어갔다. 짐을 나르고 정리하는 중간에 가스레인지 앞에 다가가니 엄마가 간을 맞추며 말했다.

“할머니도 새 식구 온다고 꽤나 신경이 쓰이셨나 보다. 주무시고 있어.”


함께 밥상에 둘러앉았을 때, 할머니는 연신 미역국이 맛있다며 입이 닳도록 칭찬했다. 인사치레인 줄 알았는데, 구체적인 레시피를 물으며 이해가 안 된 부분은 다시 물으시기에 조금 놀랐다. 관심에도 놀랐지만 배우고 익히려는 모습,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얼핏 맑고 젊은 느낌이 풍겼기 때문이다. 젊음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바뀔 가능성이 있는 상태를 말하는 거구나. 몸을 기울이며 경청하는 할머니의 모습에 자꾸 눈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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