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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Sep 23. 2024

이사 2


지난 이야기: 바뀔 환경에 대한 걱정도 잠시, 이윽고 이사가 시작되었다.


식사를 마친 뒤, 본가로 가는 부모님을 배웅하러 할머니까지 1층으로 내려갔다. 멀어지는 차를 향해 한참 손을 흔든 뒤 1층 현관에 들어오는 길에 경비아저씨와 동네 어르신들이 모여 앉아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할머니가 갑자기 내 손을 잡더니 옆에 바짝 당기고 눈신호를 보냈다. 이해하지 못하고 갸우뚱하는 사이에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1102호예요.”

“예, 알지요. 안녕하세요, 어르신.”

“그리고······.”

할머니가 나를 보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된다.

“우리 손녀예요.”

나는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가 서둘러 눈치를 챙기고 최대한 자연스러워 보이도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내가 무엇에 놀랐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과 다른 대답에 놀랐을까, 나를 가족으로 소개하는 그 온도에 놀랐을까. 경비아저씨와 어르신들이 웃으며 내게 똑같이 인사했다.

“손녀가 우리 집에서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릴게요.”

“아유, 부탁은 무슨.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손녀분이 어르신 많이 닮았네요.”

주변 할아버지들까지 다 맞장구를 치며 “허허, 정말 닮았네.”라고 말한다. 이 웃긴 상황을 부모님이 못 보고 출발하셨다니 아쉬울 따름이다.

“다른 아저씨랑 교대하실 때 말씀 좀 전해 주세요. 1102호에 손녀 와서 지내게 되었다고. 나중에 또 인사하겠지만요.”

“그럼요. 잘 전달하겠습니다.”


한참 가구를 조립하고, 짐을 풀고 있자니 할머니의 슬리퍼 소리가 칙, 치익, 칙, 치익 들린다. 열린 방문 너머에 멈춰 선 할머니를 쳐다보니 무언가를 내민다. 황토색 복슬복슬한 슬리퍼다. 

“슬리퍼 필요하면 이거 써라.”

받아 들고 보니 두 짝 다 입체적인 사자 얼굴이 달려 있다. 갈퀴까지 달려 있고 제법 귀여운 얼굴이다. 한 번도 사용한 적 없어 보이는 깨끗한 밑창. 할머니가 일부러 장만하신 걸까? 제법 귀여운 걸 고르신 안목에 웃음이 나왔다. 나보다 취향이 젊으신 것 같다.

“감사합니다.”

슬리퍼는 방 밖 공용 공간에서 신기로 생각하고 방문 앞에 가지런히 내려놓았다. 할머니가 TV를 보러 가고 나는 다시 헹거 파이프를 손에 들고 조립하려는데 열린 창문 밖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점점 가까워지는 발소리. 아직 복도로 난 창문이 익숙하지 않아 살짝 긴장된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바로 옆집이자 복도 제일 끝 집에 사는 이웃이 한 번 지나가기는 했는데, 복도식 아파트의 매너로서 앞만 보고 순식간에 지나가기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었다. 그래도 다시 발소리가 들리니 초식동물처럼 동작 그만 상태가 되어 버렸다. 내 방에서 새어 나간 빛이 비치고 있는 복도 담벼락을 응시하고 서 있자니, 이러다간 이쪽으로 걸어온 상대방이 놀라겠다 싶던 그 순간, 창밖에 험악해 보이는 인상의 초로의 남자가 방 안을 뻔뻔하게 들여다보면서 나타났다. 

“꺄악!”

“으악!”

내가 비명을 지르자 남자도 짧게 소리를 질렀다. 내 방 창문 앞에 멈춰 서서 턱을 크게 움직여 껌을 씹으며 방 안을 살펴본다. 

“누구세요?”

미간을 찌푸리고 쏘아 물어도 남자는 태평하게 방을 구석구석 엿본다.

“할머니 안 계세요?”

남자가 팔을 뻗어 현관 손잡이를 만지기 시작했다. 밤이 되어 닫아 잠가 놓았는데, 낮처럼 열어 뒀으면 방충망을 열고 들어올 기세였다.

‘저렇게 험악한 얼굴을 한 사람이 할머니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이런 건 생각도 못했다고!’

마음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할머니의 슬리퍼 끄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뭐야? 왜 그러는데?”

할머니가 내 방으로 들어오려 한 발을 내디뎠다가 방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내 슬리퍼를 보고 움찔하고는 도로 나가 슬리퍼를 벗었다. 그 행동으로 할머니가 어떤 집주인일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 이 아저씨 아세요?”

긴장한 얼굴로 창문으로 다가선 할머니는 이내 웃으며 방을 나갔다.

“아아, 하하. 오늘이었구나. 오늘이었는데 잊어버리고 있었네. 얘, 괜찮아, 괜찮아.”

알고 보니 그 남자는 신문 수금을 하러 온 사람이었고, 할머니가 현금으로 구독료를 건네자 바로 사라졌다. 신문을 구독하고 계신 줄도 몰랐거니와, 아직도 현금으로 구독료를 내는 사람이 있다는 데에 놀라서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 몇 초가 걸렸다. 하긴 노년층은 카드 결제는 고사하고 계좌이체도 번거로워 현금 지불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밤이 깊어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할머니는 거실의 큰 TV는 전혀 사용을 안 하고, 거실을 사이에 두고 안방과 반대편에 있는 작은방에서 작은 TV를 보는데, 그 방을 ‘테레비 방’이라 불렀다.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선 TV에서 새어 나오는 희고 푸른빛만 휘황찬란하게 교대하며 번쩍거리고 있었다. 이런 환경에 할머니는 용케도 잠들지 않고 돌침대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무슨 일 있니?”

“저 자려고요. 인사드리러 왔어요.”

“자는데 무얼 인사를 해? 그냥 자지.”

“아니이, 어떻게 그래요.”

경비아저씨 앞에서 나를 손녀라고 소개하던 할머니가 떠올랐다.

“왜? 앞으론 그냥 졸리면 바로 자. 괜히 인사하지 말고.”

진심인가 배려로 하는 말인가 유심히 할머니의 표정을 살펴보았지만 자꾸 바뀌는 TV 불빛에 도무지 표정을 종잡을 수가 없다.

“안 주무세요?”

“난 안 자.”

“보통 몇 시쯤 주무세요?”

“테레비 보다가 졸릴 때.”

이미 졸려 보이는데······. 아무리 TV 불빛이 요란하게 바뀌어도 할머니의 쌍꺼풀이 굉장히 진해졌다는 것과 눈이 반쯤 감겨 있다는 건 잘 보였다. 내가 가만히 서 있으니 할머니는 갑자기 흠칫 놀라며 날 쳐다봤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아니, 그냥······.”

‘건강을 위해 일찍 일찍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첫날부터 잔소리하는 세입자가 되고 싶지는 않아 말을 삼켰다.

“그럼 저 먼저 잘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응. 잘 자. 이사하느라 고생했는데 단잠을 자겠네.”




모기 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 3시 반을 넘긴 시간.

2시간 전에도 모기 소리에 깼다가 잡지 못하고 잠들었던 참이다. 창문에도 방충망이 있는데 대체 어디서 들어온 건지 한탄을 하며 시린 눈을 깜빡이며 밝은 방 안에서 모기를 찾느라 고군분투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내 단잠을 방해한 녀석을 처단할 수 있었고, 불을 끈 뒤 쓰러지듯 이부자리에 들어갔다.

한동안 다시 잠이 들지 않다가 드디어 가라앉듯 심연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찾아왔다. 온다, 온다, 잠이 온다. 그 순간, 내 방 앞 복도에도 무언가가 왔다. 

드르르륵! 

깊이 가라앉으려던 의식은 솟구치듯 현실로 돌아왔고, 눈이 번쩍 떠졌다. 이불속에서 바짝 얼어 귀를 기울였다. 내 방 창문의 방충망이 반대편으로 이동한 게 보였다. 피부와 창유리가 닿는 마찰음이 들렸다.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개구리처럼 쭈그려 앉았다. 뿌연 창문 너머로 더듬거리는 검은색 손 실루엣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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