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

by 진기유

세면대 앞에서 손을 씻는데 유연 선배가 소리 없이 옆에 다가서서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기유 씨, 연지 씨 얘기 들었어?”

얼굴을 쳐다봤는데 표정이 심상치 않게 어두웠다.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말없이 빠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연지 씨, J프로젝트 탈락했어.”

갑자기 가슴이 철렁하며 정신이 아득히 멀어졌다. J프로젝트는 연지 언니가 절실히 바라왔던 일이었고, 선정 대상이 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했다는 걸 회사 전체가 알았다. J프로젝트의 심사 위원이기도 했던 타 부서의 차장님은 이전부터도 연지 언니가 그 프로젝트를 따낼 사람인 것처럼 전제를 깔고 농담을 하기도 했었다. 4명이 지원했고 2명이 합격했다. 내가 이 정도로 놀랐는데 본인은 오죽할까. 자리에 가니 그제야 언니의 눈이 퉁퉁 부어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언니는 오후 반차를 내고 일찍 퇴근했다. 언니 때문에 간간이 불쾌했던 건 사실이지만 언니로서 동생인 나를 정말 잘 챙겨주기도 했기 때문에 선정되기를 바랐었다. 아니, 떨어질 거란 가능성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았었다. 회사 분위기도 그랬으니까. 본인은 물론 부서로서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회사에 대한 복잡한 감정을 안고 퇴근길에 올랐다. 불신이라고 하면 너무 과장되긴 하나, 믿을 곳이 못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프로젝트에 선정될 것 같았던 사람을, 누구든 ‘일 잘한다’며 칭찬했던 사람을 어떻게 불합격시킬 수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한편으론 누군가 화장실에서 흘린 말이 떠올랐다. “연지 씨는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면 회사가 제대로 본 걸지도.” 이 말을 한 사람은 평소 웃으며 연지 언니와 인사를 나누던 사람이었다. 회사 사람마저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얼마나 순진하고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스멀스멀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아, 무섭다. 진심을 다 보여서도 안되고 적을 만들지 않으려 해도 적이 생길 수 있는 것이구나. 이래서 사회를 정글이라고 하는 거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에 도착했다. 우편함에 우편물이 몇 개 있기에 꺼내 들고 엘리베이터에 탔다. 친구들이 보내오는 편지나 작은 꾸러미도 가끔 있었기에 누구 앞으로 온 건지 하나하나 넘겨 봤다. 그러다가 어떤 단어를 보고는 손이 멈췄다.


‘XXXXX대부’


받는 사람 이름을 보니 ‘김경’이라고 되어 있었다. 잘못 온 우편물인가 싶어 주소를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그 순간, 할머니가 자주 거론했던 그 이름이 떠올랐다. 딸과 둘이 사는 사람이고, 할머니께 자주 안부 전화를 하는 사람. 할머니께 매번 ‘OO가 좋다더라’라는 식으로 바람을 넣거나 어디가 아프다, 다쳤다 등 앓는 소리를 하는 사람. 대체 왜 생판 남인 이 사람의 우편물이, 그것도 심지어 대부 업체에서 보낸 것이 할머니 주소로 오는 것인가. 가뜩이나 불신감에 머리가 무거웠는데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우편물을 할머니께 건네 드렸다. 할머니도 하나하나 넘겨 보다가 그 우편물에서 손이 멈췄다. 나쁜 짓을 하다 걸린 아이 같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봤니? 들켜 버렸네.’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할머니는 애매한 웃음을 흘렸다.

“이거, 주소만 여기로 해둔 거니까 신경 쓸 거 없어.”

“대부업체던데, 그러다 나중에 독촉하러 이 집에 오는 거 아니에요?”

“에이, 안 와.”

“어떻게 확신하세요?”

“여기에 이 사람이 안 사는 걸 뭐. 주소만 빌려 준거야.”

“이 업체에서 김경 씨가 주소만 빌려 쓴 건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일단 이 집에 와보겠죠.”

“그럼 안 산다고 하면 되지.”

“하······.”

어쩜 이렇게 안일하실까?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높기로 소문난 동네에 재건축 움직임이 있는 아파트를 갖고 있는 독신이 어쩜 이렇게 안일할까. 그 무지함 혹은 대범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내 집인데 주소를 빌려 주든 말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제가 이런 쪽 잘 몰라서 그런데요, 저 없는 시간에 와서 제 물건에 빨간딱지나 안 붙일까 걱정되네요.”

“에이, 안 그런대도!”

그럴 일이 없다 하더라도, 어떻게 저런 일에 주소를 빌려줄 수 있는 걸까? 학군 때문에 주소를 빌린다는 얘기는 들어 봤어도. 할머니는 세상을 어느 정도 믿는 걸까?



*

시간이 몇 주 지나면서 회사 분위기는 평소로 돌아온 듯했지만 다시 심상치 않은 이야기가 돌았다. 프로젝트에 선정된 타 부서 사람 중 한 명이 우리 부서로 와서 해당 프로젝트를 이끌게 된다는 것이었다. 나와는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인애라는 언니였다. 결국 연지 언니는 2개월 뒤를 기점으로 정하고 퇴사 의사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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