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를 미워하는 건지 걱정하는 건지

by 진기유

저녁을 먹는데 할머니가 말했다.

“요즘 잠이 잘 안 와. 잠을 영 못 자."

“불면증이세요?”

“음, 원래도 금방 잠이 들지는 않았는데, 요즘에는 영 잠이 들지를 않아서 문제야.”

듣고 보니 요즘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TV방에서 주무시느라 내가 온 줄도 모르시는 일이 잦았다. 밤에 잘 못 주무셔서 그렇다는 걸 처음 알았다.

“병원을 가봐야 하나 모르겠어. 나 심장 때문에 의사 선생님 만나는데 그때 물어볼까 싶기도 하고.”

“네, 그러시는 게 좋겠네요. 그런데 할머니, 따뜻한 우유가 잠을 잘 오게 한다는데요.”

“우유? 그러면 잠이 온다니?”

“네. 밤에 우유를 데워서 드셔보세요.”

할머니는 미간을 찌푸리고 입술을 삐죽 내미는 뭐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알겠어.”라고 했다.


다음날, 11시를 넘긴 늦은 밤에 바닥을 끄는 슬리퍼 소리가 나더니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잊고 있었던 어제의 대화가 기억이 났고,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전자레인지가 없는 집인데 냄비에 부어서 데우시는 건가 호기심을 품고 부엌으로 들어간 순간, 물이 담긴 냄비 속에 통째로 들어가 있는 투명 페트 용기가 눈에 들어왔다. 가스불은 맹렬히 올라오고 있었다.

“할머니!”

가스레인지 옆에 서 있던 할머니는 살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언제 왔대?”

“우유 들어있는 거 페트병 아니에요? 저대로 데우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무슨 말이야? 이게 왜 안되는데?”

“일단, 잠시 비켜 주실래요? 가스불부터 끄고요.”

서둘러 불을 끄자 할머니가 눈썹을 치켜뜨고 물었다.

“뭐 하는 거야? 왜 불을 꺼?”

“이 우유병이 유리도 아니고 두꺼운 플라스틱도 아니고, 페트병인데 중탕하면 환경호르몬 나오고 위험할 것 같아요. 제가 데워드릴게요. 우유를 냄비에 부어서 데울게요.”

우유병을 꺼내려는데 할머니가 내 손을 탁 치면서 밀어냈다.

“아니, 환경호르몬? 찐기유 씨, 이거 아주 비싼 우유예요. 저기 C매장에 가서 사 온 거라고.”

“비싼 우유든 아니든 이 용기 자체가 문제라고요, 할머니. 그리고 이 많은 양을 한 번에 다 드시지도 못하잖아요. 그러면 데웠던 우유가 남게 되는데 위생적으로도 안 좋지 않을까요?”

“식히고 냉장하면 되지, 왜? 이거 비싸고 좋은 우유라서 괜찮다니까?”

할머니의 표정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고집스러움이 느껴졌다. 함께 산 뒤 처음으로 눈앞의 할머니가 정말 ‘할머니’로 느껴졌다. 본인이 아는 것이 전부인, 타인의 의견에는 귀를 닫는 ‘노인’. 마음 같아선 다시 손을 뻗어 우유병을 꺼내고 싶었지만 아까 할머니가 내 손을 거칠게 밀어내던 감촉이 가슴팍에서 기억날 정도로 불쾌했다.

“저는 분명 말씀드렸어요.”

한마디만 덧붙이고 바로 그 자리를 떴다.


그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러 나가기 전 마주쳤는데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그래도 도리를 생각하여 먼저 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저녁에 퇴근을 하니 할머니가 평소와 달리 식탁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났다. 어색해하면서 다가오셨다.

“왔니? 아까 낮에······. 아니다. 먼저 씻어라.”

“말씀하세요. 낮에 무슨 일 있었어요?”

“그건 아니고, 어제 네가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빙빙 도는 거야. 그래서 오늘 낮에 C매장에 전화해서 물어봤어.”

“······.”

“응, 그랬더니 자기네들은 잘 모른다고, 우유를 만든 회사에 물어 봐 주겠다고 하더라고. 그러고 한참 있다가 전화가 와가지고는, 저 병은 병째로 중탕하면 안 좋은 게 맞고, 냄비에 덜어서 데우라고 하라더라.”

아무 말도 할 기력이 없었다. 승리의 쾌감 같은 것은 전혀 없고, 내가 말했을 땐 들으려 하지도 않던 것을 제조사에서 말하니까 바로 신용하는 모습에 다소 불쾌한 기분마저 들었다. 내가 아무 말 없이 보고 있으니 할머니가 “왜 아무 말이 없어?”라고 물었다. 바로 입을 열었다가는 공격적인 말이 튀어나갈 것 같아 한 템포 참고 말했다.

“네, 이제 냄비에 부어서 데우시면 되겠네요.”

입꼬리를 올려 형식적인 미소를 보인 뒤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내렸다. 그러자 할머니가 뒤따라와 설명을 시작했다.

“C매장은 말이야, 유기농만 팔고 비싸고 좋은 것만 팔아. 이게 우유가 안 좋아서가 아니고, 병이 그래서 그렇다더라고. 그리고 먹을 만큼만 데워 먹는 게 좋다고 하더라고, 그 양반이.”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제 내가 말한 것과 완벽하게 동일한 내용이었다. 할머니의 걸걸하고 큰, 높낮이가 심하게 오르내리는 느린 말투가 짜증스럽게 귀에 박혔다. 말투는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가르침을 주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손을 씻으러 방을 나가며 “어제 제가 한 말이랑 똑같네요.”라 말하고 빠르게 욕실로 걸어갔다. 할머니는 그 뒤로도 C매장 담당자가 단골인 당신을 기억하고 있었고, 얼마나 친절하게 전화를 걸어왔는지 얘기했다. 내가 방으로 돌아가는데도 이야기가 끝날 기미가 없었다.

“할머니, 죄송하지만 저 피곤해서 잠깐 문 닫고 쉴게요.”

어젯밤 가스레인지 앞에서 나를 쳐다보던 할머니의 표정이 어른거렸다.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이어지면 곤란한데,라고 생각하며 멍하니 창 밖 회색빛 하늘을 쳐다봤다. 신문지도 그렇고, 아무 일 없던 일 년의 반동처럼 화 나는 일이 연달아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과연 저 할머니를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계속 잘 지낼 수 있을까?



*

처음으로 해외 출장을 다녀온 날, 한국에 오후 햇살이 남아있을 때 도착해 평소 퇴근 시간보다 살짝 일찍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에 열쇠를 꽂으며 이른 귀가로 할머니를 깜짝 놀라게 할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현관으로 올라 서자 집안이 고요하다는 걸 느꼈다. 할머니가 평소에 자주 신어 꺼내놓는 신발도 보이지 않았다. 외출에서 안 돌아오셨겠거니 하고 짐을 풀고 할 일을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바깥은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시계를 보니 저녁 8시가 가까워오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까지 할머니가 안 들어오시는 일이 없기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오늘은 특별한 약속이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생각을 딴 데로 돌리려 애썼다. 할머니가 오시면 먹으려고 저녁식사를 미루고 있었는데 도저히 배고파서 참을 수가 없어서 먹기 시작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복도에서부터 느리게 발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씹던 것을 삼키고 몸을 일으켜 현관 쪽으로 다가서는데 현관문에 열쇠 꽂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은빛의 번쩍이는 무언가를 잡고 선 할머니가 보였다. 호된 일을 당한 듯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할머니!”

할머니는 잠시 멈칫하고는 그 번쩍이는 물건을 현관에 올리고 몸을 지탱해 들어오셨다. 그건 목발이었다.

“아니, 무슨 일이에요? 다리 다치셨어요?”

“아, 너 돌아와 있었구나, 그래. 오늘이었지.”

할머니는 시원한 대답 없이 식탁의자에 앉았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몇 번 하시는 동안 나는 느리게 밥을 떴다.

“식사, 하시겠어요?”

“아냐.”

할머니는 한숨을 깊게 쉬고는 눈을 떴다.

“어쩌다가 다치신 거예요? 예?”

“내가 밖에서, 길에서 넘어져서, 세상에 구급차로 C병원에 실려갔다 왔어.”

“응급실에 다녀오신 거예요?”

할머니의 다리를 다시 살폈다. 생각보다 견고한 깁스를 하지는 않았고 간이 깁스처럼 보이는 것만 덧대어져 있었다. 넘어진 건지, 구른 건지, 얼마나 아픈지, 누가 신고를 해줬고 보호자로 따라붙었고 어떤 치료를 받고 오신 건지 꼬치꼬치 캐물어 대답을 들었다. 할머니도 내심 어떤 일이 있었는지 줄줄이 설명하면서 안심이 되는 모양새였다. 이번 일로 할머니가 ‘약자’ 임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물론 출장 중이라 부르지도 못하셨겠지만, 함께 사는 내가 ‘보호자’ 역할을 못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게도 생각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내 눈앞의 할머니는 너무 피곤하고 힘이 없고 무력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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