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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해인 Oct 23. 2024

20. '다음에'가 다음에도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

 #강신영 - 클럽 가는 중

 한적한 골목에 차를 주차시킨 강신영은 곧장 내달린다.


 뒷문과 인접해 있는 담벼락을 넘어 잠입할까 하다가 짧은 고민 끝에 정공법을 택한다.


 애석하게도 그에겐 담벼락을 훌쩍 넘을만한 민첩성과 유연성이 전무하다.


 클럽 입구로 힘차게 달려 들어간다.


 입구 주변에는 마블과 DC 영웅들이 회담을 벌이고 있고, 디즈니 영화 속에서 튀어나온 온갖 공주와 마녀, 그리고 다소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분장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좀비를 비롯한 괴생명체가 우글우글하다.


 “무슨 일이시죠?”


 갑자기 등장한 경찰에 당황한 가드가 막아선다.

 타노스가 지키는 클럽이라니, 듬직하면서도 섬찟섬찟하다.


 그제야 근무복 차림 그대로 왔다는 것을 인지한 강신영 소장이 공무원증을 꺼내 보여주는 단계는 생략해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안에 볼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할게요. 일단 좀 갑시다.”


 그때, 클럽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통해 걸어 나오고 있는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강신혜다.


 어딘지 모르게 짜증이 난 얼굴이다.


 그녀 뒤로 이십대로 보이는 남자가 따라붙는다.


 중키에 몸도 꽤 탄탄해 보이는 건장한 남성이다.


 다만 뒷목을 가득 덮은 날개모양 타투가 멀끔한 이미지를 다 깎아먹고 있다.


 “아아, 잠깐만. 왜 벌써 가?”


 남자가 말한다.


 강신영의 시선은 남자가 붙잡은 딸의 팔에 고정되어 있다.


 “집에 일이 있어서요.”


 강신혜가 귀찮다는 듯 무신경하게 대답한다.


 “……아, 그래? 부모님 말을 잘 듣는 편이구나? 그럼 어쩔 수 없지.”


 남자는 의외로 순순히 팔을 놓는다.

 그러더니 대뜸 재킷 안주머니에서 숙취해소음료를 건넨다.


 “마셔. 다음에 꼭 다시 봤으면 좋겠다. 아까 내 번호 저장했지? 거기로 연락 줘.”


 강신영 소장의 눈이 날카로워진다.


 굳이 음료수 뚜껑까지 손수 따서 건네주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진다.


 그가 큰소리로 딸을 부른다.


 “신혜야!”


 강신혜가 뒤돌아본다.


 “……아빠?”


 그때 강신혜와 마주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에 낭패감이 스친다.


 “씨발, 뭐야?”


 남자는 돌연 음료수 병을 바닥에 내던지고 바지주머니에서 주머니칼을 꺼내 들더니 강신혜의 등 뒤로 가서 목 부근에 칼을 들이민다.


 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강신영 소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무의식적으로 권총을 빼어든다.


 그 행동이 범인과 행인들을 더욱 자극해 주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슈퍼맨과 배트맨이 가장 먼저 나 몰라라 도망가고 조커와 할리퀸이 끝까지 남아 시민들의 안전에 힘쓰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저기, 일단 칼부터 내려놓고 얘기하지.”


 강신영 소장이 차분히 대화를 시도한다.


 그러나 오늘로 근무 2일 차인 마약배달원3은 이미 흥분한 상태다.


 “뭐야! 어떻게 알고 왔어! 나 아직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강신영 소장은 벌벌 떨고 있는 강신혜를 본다.


 강신영이 말한다.


 “신혜야! 신혜야?”


 아빠의 부름에 강신혜가 가까스로 눈을 뜬다.


 “옳지. 아빠 봐. 아빠 여기 있네. 응, 그래. 아빠 보고 있어.”


 “씨발, 경찰 딸이었어? 이거 완전히―”


 마약배달원3의 말이 채 마무리되기 전에 총소리가 허공을 가득 채우고, 새된 비명소리가 이어진다.


 “으아아악! 내 손!”


 마약배달원3은 칼을 쥐고 있던 왼손을 부여잡으며 바닥을 뒹군다.


 경찰들이 매 분기별로 진행하는 정례사격 때마다 진강석 경장은 매번 꼴등을 차지한 반면, 강신영 파출소장은 여태 단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명사수 중 명사수다.





 #홍준영 - 든든한 공권력에 안심하는 중

 적의 본진에 와 있는 게 분명하지만 생각만큼 무섭지는 않다.


 왜 그런 걸까, 홍준영은 고심해보다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진강석을 올려다본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사람의 직업보다 큼지막한 주먹이 더 위안을 준다.


 그의 얼굴에는 중범죄를 저지른 범인을 검거했다는 홀가분함이나 인간에 대한 회의감이 아닌, 명징한 활기가 깃들어있다.


 기분 좋게 운동을 마친 사람을 보는 것 같다.


 진강석이 조직원들의 연장을 한 곳에 모아둔다.


 숨기고 있는 다른 연장이 있을지 모르니 몸을 샅샅이 뒤지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역할은 홍준영에게 맡기로 한다.


 홍준영의 손놀림을 가만히 지켜보던 진강석은 이놈이 왜 유능한 도둑인지 비로소 이해한다.


 소리가, 홍준영의 주위에 있는 모든 소음이 사라진다.


 걸음을 옮길 때는 물론이고, 숨소리, 손이 외투에 닿을 때조차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손길이 닿았다 하면 갈퀴로 수확물을 끌어 모으는 것처럼 무언가가 속속들이 나온다.  


 “너 진짜 잘 훔치는구나? 손이 엄청 빠르네.”


 진강석이 진심으로 감탄한다.


 “……그래? 칭찬 고마워.”


 물을 잘 끓이는 커피포트라도 된 심정으로 홍준영이 멋쩍게 답한다.


 경찰한테 도둑으로서 자질이 뛰어나다고 칭찬을 받으니 오금이 저릴 지경이다.


 범죄자들을 묶어둘 마땅한 곳이 없을까 궁리하던 진강석은 가게 인테리어 구상 당시 양태호의 정신상태를 의심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된 게 쭉 늘어선 바 스툴의자를 바닥에 고정시킬 생각을 했을까.


 바 테이블과의 간격도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설치해서인지 의자에서 테이블까지의 묘한 거리가 어지간히도 거슬린다.


 뭐, 그래도 그 덕에 바닥에 뻗어있는 범죄자들을 못 도망치게 묶어놓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방금까지는 바닥과 하나였다가 이제는 케이블타이에 양손이 묶인 채 스툴의자와 하나가 된 마약사범들을 보자 덫에 걸린 짐승을 보는 것 같은 측은한 감정이 일기도 한다.


 “저어, 형사님?”


 조직원7이 말을 꺼낸다.


 진강석은 물끄러미 시선을 내던지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조직원7은 한참을 쭈뼛대더니 더듬더듬 본인이 원하는 바를 요구한다.


 자기가 생전 처음 겪는 일이어서 그런지 너무 긴장도 되고 금단현상까지 겹쳐서 그러는데 혹시 흡연이라는 사치를 허락해 주실 의향이 있는지 묻는다.


 “맘대로 해. 대신 과태료는 꼭 받을 거야.”


 경찰의 말에 조직원7은 어차피 당분간은 돈 쓸 일도 없을 것 같으니 과태료는 얼마든지 내겠단다.


 잘못 한 번으로 의식주 중에 의식주 모두를 해결하게 되었으니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면 좋은 점도 얼마든지 있는 것 같단다.


 범죄자의 배은망덕한 소리에 진강석이 뒤통수를 가격한다.


 “아, 세금 아까워.”


 흥분으로 가득하던 재즈 바 <카사블랑카>는 평소의 안정을 되찾는다.


 여기에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 모두 사이좋게 한 번씩 누군가의 주먹에 얻어맞아 기절을 했다는 점이고, 그 누군가인 경찰이 눈앞에 어슬렁거리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행정상 처리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지만 사건처리는 경찰에게 맡기면 될 것이고, 금고에 있던 장물들은 어디 솜씨 좋은 도둑에게 맡기면 될 일이다.


 운이 좋게도 경찰과 도둑 모두 사건현장 반경 1미터 안에 머무르고 있던 참이다.


 진강석이 잠시 잊고 있던 직장인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보고전화를 한다.


 ―어, 강석아. 안 그래도 연락 기다렸다.


 강신영은 진강석 경장의 검거 실패는 단 한순간도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느긋하게 대답한다.


 “전부 현행범으로 체포했습니다. 마약 팀에 인계까지 하고 복귀하겠습니다.”


 ―다친 곳은? 없어?


 “예, 별 저항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진강석은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시간대별로 일목요연하게 읊기 시작한다.


 그걸 듣는 홍준영은 그 수위가 본인이 본 것과 사뭇 다른 것 같아 속으로 웃음을 흘린다.


 폭력적이고 잔혹한 장면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을 받은 영화를 15세 관람용으로 탈바꿈하려는 진강석의 노력이 왜인지 친근하게 다가온다.


 또, 그동안 품고 있던 불법의 기준을 하향조정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너무 바르게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저리 사람을 수제비 반죽하듯 패는 경찰도 있는 마당에 빈집털이는 지나치게 평화롭게 보인다.


 ―저항할 기회도 안 주고 냅다 패버린 건 아니고?


 “……뭐, 패기야 팼죠. 저도 사람 안 때리고 검거하면 너무 좋은데, 소장님도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현장은 현장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고요.”


 ―잘 알지. 항상 네가 그 간단하지 않은 문제들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는 것도 잘 알고. 한 번 패면 될 걸 두 번 세 번, 가끔 신나면 네댓 번은 패버리니까.


 강신영 소장이 끙 앓는 소리를 낸다.


 불과 십분 전에 범죄자의 손에 총알 한발 시원하게 갈겼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는다.


 ―아무튼 쉬는 날에 고생 많았다. 현장 잘 마무리하고.


 “예, 들어가십시오.”


 진강석은 입 끝을 ㅅ자로 구부리며 고개를 크게 내젓는다.


 검거된 조직원들은 반성의 기미 하나 없이 여전히 지들끼리 수다를 떨고 욕을 퍼붓는다.


 “병신아, 너 그러다 형사님한테 또 맞을걸.”


 담배를 태우던 조직원11이 바로 옆에 나란히 묶여있는 조직원10을 깔본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기절도 일단 잠자는 건 맞잖아? 나 너무 졸려.”


 알고 보니 조직원10은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던 참이다.


 불면증이 너무 심각한 나머지, 아까처럼 외부의 강한 물리적 타격에 의해서라도 잠을 청하고 싶은 모양이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자의로는 잠에 들 수 없다.


 그쪽으로는 나름 전문이라며 대화를 엿듣고 있던 진강석이 선뜻 나선다.


 “내가 해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꼭 그렇게 해달라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조직원10은 몸을 바짝 수그린다. 


 “저, 형사님 ”


 이번엔 조직원6이 진강석을 부른다.


 “또 왜.”


 “얘가 형사님이랑 다시 붙어보고 싶다는데요?”


 긴장이 있는 대로 풀려버린 조직원6은 듣는 사람 기분이 나쁠 정도로 낄낄거리며 조직원5에게 턱짓을 한다.


 “개소리하지 마.”


 조직원5가 좋아하는 여자애의 이름을 들킨 중학생처럼 얼굴을 붉히며 떽떽거린다.


 “형사님, 아니에요. 얘가 지 혼자 떠드는 거예요.”


 “네가 아까 나한테 그랬잖아. 일대일 입식으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고.”


 “아까는 두세 명씩 우르르 몰려다녀서 졌다?”


 진강석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짓는다.


 “그렇다니까요? 분명 그렇게 말했어요!”


 조직원6은 당장이라도 둘이 다시 붙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타이밍에서 그는 마법의 문장을 읊는다.


 전 세계 모든 남자들의 의욕을 불태울 수 있는 자극제.


 “야, 너 쫄았지?”


 “쫄아? 내가?”


 조직원5는 혀를 차며 부정한다.


 “응, 네가.”


 호기로운 등장과 달리 우울하게 퇴장했던 김종수가 이때다 싶었는지 대화에 참여한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총은 좀 치사했어요. 반칙이에요.”


 “대가리가 열네 개인 건 반칙이 아니고?”


 진강석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대가리 숫자가 많아서 좋았다고 소감을 밝힌다.


 조직원들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진강석이라는 이 경찰은 사람을 패는 행위에서 성적 호감을 느끼는 정신이상자이거나 그에 준하는 또라이가 분명하다고 확신한다.


 진강석이 자비를 베풀 듯 너그러운 목소리로 김종수를 향해 말한다.


 “그쪽은 진지하게 다른 일 알아봐. 보아하니, 운동도 좀 한 것 같고 얼굴도 잘생겼으니까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거야.”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농담으로라도 잘생겼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는 김종수는 경찰의 외모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시선을 돌린다.


 외모 칭찬은 외모 칭찬으로 받아쳐야 한다는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잊은 채 그는 그저 속없이 헤헤 웃는다.


 “저기 형사님?”


 마약 중독보다 탄수화물 중독 치료가 시급할 것 같은 조직원9가 버둥대며 말한다.


 “저는 먼저 경찰서에 가있으면 안 될까요?”


 “먼저 가서 뭐하려고? 어차피 조사는 같이 시작할 텐데.”


 “……그게, 설렁탕 먼저 먹고 있을 수 있나 해서요.”


 조직원9는 사과 껍질을 던져줘도 좋다고 웃으면서 씹어 먹을 만큼 굶주린 상태다.


 “직원들 끼니는 잘 챙겨가면서 일을 시키셨어야죠.”


 진강석이 양태호 사장을 나무란다.


 양태호 사장은 별 대꾸도 없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음침한 얼굴로 그동안 힘겹게 일군 사업체의 몰락을 직시한다.


 때마침, 경찰서에서 지원이 도착하고 범죄자들이 하나둘 수송차로 이송된다.


 진강석이 케이블타이를 잘라내고 수갑을 채우자 양태호 사장이 돌연 수갑에 묶인 두 손을 축 늘어트린 채 바닥에 드러눕는다.


 “……뭡니까?”


 진강석이 무슨 개수작이냐는 듯이 내려다본다.


 “들것으로 데려가던가 해. 나는 못 가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못 걸으시겠어요?”


 부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철저히 가해자 쪽에 서야 하는 진강석이 관자놀이를 긁적인다.


 다른 부하직원들에 비하면 그쪽한테 가한 폭행 수준은 딱밤에 불과했다고 말하려다 참는다.


 “못 걷는 게 아니라, 안 걸어! 이제 줄창 철창 신세질 게 빤한데, 내 무덤을 내가 삽질해서 들어가라고? 난 손 하나 까딱 안 할 거야.”


 양태호는 경찰의 불공정한 것으로 모자라 불쾌하기까지 한 처사에 과감히 항의한다.


 총을 든 사람에게 버럭 소리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당분간 손 하나 까딱 못 하게 해 드릴 자신은 있는데요. 공교롭게 제가 그걸 제일 잘하거든요. 아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지켜보셔서 누구보다 잘 아시겠지만.”


 “……지금 협박하는 거야? 경찰씩이나 돼서!?”


 양태호는 상대를 업신여기며 투덜댄다.


 “협박으로 들렸나요? 다시 잘 들어보면 아닐 거 같은데. 어떠세요?”


 평소처럼 말보다 몸으로 먼저 보여줄까 했지만 연장자를 공경하는 차원에서 진강석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반문한다.


 밥만큼은 제 손으로 먹고 싶었던 양태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재촉한다. 다시 잘 들어보니 아닌 게 맞는 것 같다.


 “……기왕 갈 거 얼른 가자고. 밤도 늦었는데.”     





 #강신영 - 딸과 함께 귀가 중

 강신영은 부하직원들의 배려로 딸 신혜와 함께 곧장 퇴근길에 오른다.


 부녀가 탄 자동차는 데시벨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터지는 폭탄이라도 설치되어있기라도 하듯 고요하다.


 하필이면 전기차여서 엔진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다.


 “…….”


 “…….”


 막내딸과 나누는 살가운 대화가 고팠던 강신영은 대화의 물꼬를 틀어줄 공통점이 없을까 고민한다.


 한참을 멀뚱하게 앉아 함께 곱씹을만한 과거 여기저기를 탐닉해봤지만, 적당한 게 떠오르지 않는다.


 유일한 공통점이라고는 막내딸은 언니를, 강신영은 첫째 딸을 미칠 듯이 그리워한다는 것뿐이다.


 “……아까, 아빠 총 쏜 거 봤어? 잘 쏘지?”


 기껏 꺼낸다는 얘기가 불과 삼십 분 전에 겪은 크나큰 공포를 되새기게 하는 질문이다.


 강신혜가 머쓱하게 웃어 보이며 답한다.


 “어? ……어. 한 번에 맞췄던데.”


 “그게 원래는 공포탄이어야 되는데, 아빠가 일부러 빼놓은 거야. 바로 쏠 수 있게.”


 “아……, 그랬구나.”


 아빠가 아니라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 남동생 같다고, 강신혜는 생각한다.


 정지 신호에 멈춰 선 강신영은 고개를 슬쩍슬쩍 돌려 딸아이를 쳐다본다.


 대놓고 보면 왠지 딸이 싫어할 것 같다.


 문득 라디오에서 소개해준 소설 속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버지라는 작자들은 순간을 살아야 한다. 자녀의 어린 시절은 비누 거품과도 같아서 감상할 수 있는 시간이 몇 초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버지들은 순간을 붙잡아야 한다.’


 오늘 강신영은 한순간은커녕 한 세월을 통째로 날릴 위기에 휩싸였던 것이다.


 이번만큼은 자식을 무사히 지켜냈다는 자부심과 시간을 돌려 머나먼 그때로 돌아가 첫째 아이도 지켜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후회를 동시에 느낀다.


 버릇처럼 옛날 일에 얽매어 사는 본인이 한심스럽다.


 내 딸은, 또 다른 딸은 바로 옆자리에 있는데.


 딸아이와 단둘이 시간을 보낸 지가 언젠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제아무리 요새 나이가 들면서 기억력이 감퇴했다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강신영은 항상 바빴다.

 일에 치여 살았다.


 ‘다음에’와 ‘시간 날 때’라는 단어를 습관처럼 꺼내어 무기처럼 썼다.


 신호가 바뀌고 강신영이 다시 차를 운전한다.


 “딸.”


 나지막한 목소리로 강신영이 말한다.


 이 세상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이 얼마나 복잡한지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그 방법을 모르겠다.

 하는 수없이 그는 매번 고수해 왔던 방식을 택한다.


 보고한다.


 자기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무엇도 보태지 않고 담백하게 말한다.


 “……인생은 너무 복잡하더라.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사람들이 너무 많은 일들을 저지르더라. 얼마나 복잡한지는 너무 복잡해서 아빠도 잘 모르겠어. 근데 꼭 복잡하다고 해서 복잡하게 살 필요는 없는 거 같아.”


 “…….”


 강신혜는 창밖을 응시한다. 


 “구해줘서 고마워, 아빠. 아까 되게 멋있었어. 슈퍼맨이랑 배트맨도 나 몰라라 하던데.”


 강신영이 말을 잃는다.


 딸아이의 직접적인 칭찬을 듣고 난 뒤에 취해야 하는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강신혜도 아주 오랜만에 해보는 말에 무척이나 어색하다.


 그녀는 엄마와 단둘이 있을 때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가 본다.


 잠시 후, 강신혜가 한숨을 내쉰다.


 세상에 관심이 많은 아빠는 세계금융시장과 최근 새로 발효된 정책, 개정된 주택정책, 국회의원 자녀의 입시비리, 나아가 각종 범죄와 관련된 법 조항에 대해 구구절절 늘어놓을 수 있지만 그녀가 예전부터 수십 번은 말해줬던 친구들 이름을 대가며 이야기를 시작하자 15초에 한 번씩 질문을 던진다.


 “지민이가 작년에 결혼했다는 애 맞지? 성남 쪽에서 초등학교 선생님하고 있고.”


 지민이는 강남역 근처 영어 학원에 재직 중이고 석 달 전 1년간의 결혼생활을 마치고 이혼했다.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서자 대화가 뚝 끊긴다.


 강신영은 운전을 조금 더 천천히 할 걸, 뒤늦은 후회를 해본다.


 아쉽기는 강신혜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위협을 겪고 나서야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게 된 다소 전형적인 흐름이지만, 어찌 됐든 아버지에게 어떻게든 고마움을 표현하고 싶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녀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가장 무난한 수를 내놓는다.


 “……아빠, 이번 크리스마스 때 근무해?”


 딸의 말에 강신영은 소스라치게 놀란다.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가 찾아오겠지만 트리 판매업자도 아닌 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저 추운 겨울날 중 하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오히려 경찰 된 입장에서 수많은 행인들이 모여 사건사고가 벌어질 가능성만 높은 피곤한 날이다.


 강신영은 올해에도 케빈이 집에 혼자 있을지 알아볼 요량으로 사무실에 있는 자그마한 TV나 볼 줄 알았건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오랜만에 가족끼리 오붓하게 저녁이나 먹자는 딸아이의 말에 강신영은 춤이라도 출 기세다.


 “좋지, 좋지! 아빠는 당연히 오케이지.”


 두 달 뒤에나 있을 식사자리가 이토록 사람을 흥분시킬 수 있는 것이었는지 강신영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아빠의 얼굴이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밥 한번 같이 먹자고 졸라댔다가 긍정의 대답을 들은 소년 같다.


 강신혜는 돌연 끓어오르는 뭉클한 감정에 코가 시큰해진다.  


 “……뭐야? 당신 오늘 늦게 온다면서? 그리고 왜 둘이 같이 와?”


 나란히 들어오는 부녀를 보며 아내가 묻는다.


 강신영은 생각보다 신고도 별로 없고, 생각보다 일할 직원들이 많아서 일찍 왔다고 둘러댄다.


 딸아이는 평소처럼 아무런 대답도 없이 방으로 훌쩍 들어간다.


 하지만 강신영은 전혀 쓸쓸하지 않다.

 전혀 외롭지 않다.

 실실 웃음이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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