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기억 #연인과 부부 #추억과 현실 #사랑의 온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자국씩 세듯 걸었지만
어느새 집 앞 이르러 마지못해 돌아설 때
들어가
라면 먹고 갈래?
늦은 밤 그 맛이란
아내는
오늘 저녁도
라면 끓여 내 온다
퉁퉁 불어 터진 면발 몇 올 건져 올리며
지금도 좋아한다고 여기는 걸까?
설마….
"라면 먹고 갈래?"
이보다 더 로맨틱한 말이 있을까?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애매~하게 마음을 간질이는 이 한마디. 듣는 사람 입장에선 살짝 헷갈린다. '진짜 라면을 먹자는 건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가?'
이 대사는 2001년 영화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이후 드라마나 예능에서 자주 패러디되면서 대중적인 유행어가 되었나 보다. 단순한 식사 제안이 아니다. 늦은 밤, 함께 있고 싶다는 감정을 대단치 않은 듯 라면으로 핑계 대지만 온통 설렘과 기대, 두근거림이 담긴 심쿵한 한마디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남자친구(현 남편) 집에서 걸어 20분쯤 거리에 내 자취방이 있었다. 그 거리를 함께 걷는다. 집 앞에 다다르면 그냥 헤어지기 못내 아쉽다. 이번엔 내가 바래다주겠다 우겨 왔던 길을 되짚어 걸어간다. 남자친구 집 앞에 도착하면 "밤길을 여자 혼자 어찌 보내?" 또 되돌아 걷는다. 저만치 내 집 앞 가로등 불빛이 비칠 때쯤이면 걸음은 천천히, 더 천천히….
이제는 그때, 그 라면 맛이 아니다. 어디 라면뿐인가? 퉁퉁 불어 터진 면발처럼 나는 새초롬하니 어여뻤던 그때 그 아가씨도 아니다.
"오늘 저녁엔 라면 어때?" 하면 기겁을 하듯 "아니, 밥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