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찬민들레 Oct 26. 2024

내겐 너무 무거웠던 왕관의 무게

초고속 승진의 혹독한 대가


실버인력뱅크는 내게 의미 있는 곳이었다. 제대로 다녀본 첫 직장이기도 했고,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큰 제약 없이 다양한 경험을 시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러 기관이 함께 있는 곳이다 보니 단순히 노인복지뿐만 아니라 민간 NGO의 역할도 어렴풋이 경험해 볼 수 있었는데 청소년과 아동, 그리고 지역사회를 지근거리에서 관찰하고 실제 지역사회 활동가처럼 일을 해 볼 기회도 있었다.

좋았던 일도, 싫었던 일도 물론 있었지만 그래도 5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애사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분명 행운이다.


막내 신규 사회복지사로 입사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함께 일하던 팀장님이 급작스럽게 개인사유로 퇴사하게 되었다. 이제 막 회사 생활에 적응하고 내 일을 스스로 컨트롤하는 법을 배웠는데 홀로서기 아닌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아니, 핏덩이 같은 저를 두고 어디 가시는 거예요 오오ㅜㅜ'

팀장님의 퇴사소식을 듣고,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팀장님은 착잡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너 지금, 이렇게 철딱서니 없이 징징거릴 때가 아니야.'


나만큼 애사심이 깊었던 팀장님은 앞으로 우리 기관이 어떤 방향으로 나가야 하는지, 누가 새로운 팀장님이 될 건지 찬찬히 말씀해 주셨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팀장 포함 정규직원 2명, 계약직 직원 3명이 전부인 소규모 기관이었다.)

나에게 새로운 팀장님은 너무너무 중요한 존재였다.

단순히 사람이 좋은 것뿐만 아니라 앞으로 내가 가게 될 사회복지의 길에 길잡이가 되어줄 사람이어야 했고, 아직 백지상태인 내가 거의 복사당하다시피 배울 점이 많은 사람이어야 했다.

사회복지 경력이 3년 정도라도 되었더라면, 팀장님의 영향력이 그때만큼 크지는 않았으리라.


새로 오신 팀장님은 나와 입사 동기였다.

같은 날 입사해서 그는 시니어클럽에, 나는 실버인력뱅크에서 사회복지사로서의 첫걸음을 떼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면서 사회복지를 배워나가고 있던 중이었다.

싹싹하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그는 시니어클럽뿐만 아니라 법인 직원들에게도 일 잘하고 성격 좋다 인정받았고 무슨 일을 맡겨도 척척 해내는 척척박사로 통했다.


그런데, 아무리 일을 잘해도,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팀장'이라고?

중요한 건, 그는 나와 같은 1년 차 사회복지사였던 것이다.

그때는 팀장 직위에 대한 경력제한이 지금만큼 까다롭지는 않았던 터라 기관 내에서 합의만 되면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안이었다.

팀장님은 오랫동안 몸담았던 팀장의 자리에 나와 동기인 직원이 1년의 사회생활 평판과 평직원으로서의 능력만으로 온다는 것에 언짢아하셨고, 내게 중심을 잘 잡고 배움의 기회를 많이 찾도록 당부하셨다. 팀장이 바뀌면서 시니어클럽 과장님이 자문 위원처럼 슈퍼비전을 주시기로 정리가 되었다.



그래, 앞서 언급했듯 이곳은 다양한 기관이 한 사무실을 사용한다는 장점이 있었고, 조언이나 중요한 결정은 다른 기관 과장님을 통해서 보완해 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나의 팀장님이 되었고 동기에서 직장상사로 관계가 재설정되었다.

역시 그는 너무 좋은 사람이었고, 직원이었던 나를 살뜰히도 잘 챙겨주었다.

단순히 나보다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직원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능력이 뛰어난 직원이자 팀장이었다.

그래, 이 작은 기관에 직위가 무슨 의미가 있어.

누가 오든 내가 배울 점은 꼭 있을 테고, 평소처럼 의지하고 응원하면서 같이 일하면 되는 거야.

라는 생각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이런 안일한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새로 오신 팀장님과는 일을 할 때마다 삐그덕 거렸다.

단순히 의견이 맞지 않거나 생각이 다른 것을 떠나, 팀장님은 나에게 새로운 길이나 비전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 신규 사업 기획 회의에서도, 기관의 연간 운영계획을 수립할 때도 묵묵부답.

노인복지기관 연 회의에서도 의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만사 오케이.

프로그램 운영 중 조언이 필요할 때 실절적인 조언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내가 의견으로 포장한 조언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처음엔 수용적이고 나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반복되는 현실에 점점 '팀장님'이 아니라 사회복지 길을 먼저 걸어간 '선배님'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팀장님이 갑자기 출근하지 않았다.

무단결근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출근하다가 사고라도 난 건지 걱정이 되어 수십 번 전화를 걸었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중에는 수신거부 상태.

오기가 생긴 나는 퇴근하기 전까지 쉬지 않고 전화를 걸었고, 결국 그날 팀장님은 무단결근 상태로 하루를 넘겼다.

알고 보니, 만취 후 출근시간을 놓쳤고, 계속 울리는 전화벨에 심적 부담이 커져 출근할 수 없었다고 했다.


너무 어이가 없고 화가 났다.

다른 것도 아니고 무단결근 이라니.

일반 직원도 아니고 팀장이.


 

이대로는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이 답답했지만 며칠 뒤 있을 시청 지도점검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그런 감정조차 일단 제쳐두고 준비에 매진했다.

점검 준비가 끝나고, 점검에 점검까지 이중체크 했음에도 너무 불안했다.

지도점검 하루 전날, 하루종일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불안했고, 확인했던 걸 또 확인하고, 확인하느라 시간을 허비했다.

모든 준비는 끝났고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그랬을까.

특별한 사고 없이 지도점검을 끝내고 회의실에 앉아있는 내게 평소 의지하던 과장님이 오셔서 수고했다 말씀하셨다.


'하아... 과장님,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어요'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는데 팀장님 한 분이 바뀌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의 직장생활이, 나의 커리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땐 정말 원인을 잘 몰라 더 답답하고 속상했다.

이런 내 고민을 가만히 듣던 과장님이 한마디 하셨다.


'그거 믿을 구석이 없어서 그런 건데...'

모든 준비를 아무리 완벽히 해도 또 체크하고 확인하고 뒤돌아보고,

기관의 일이 잘못되면 큰일 날 것만 같은 과도한 불안감.

내가 팀장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팀장님을 의지하지 못해서 아무리 해도 불안한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덧붙이셨다.


'네가 그냥 팀장이라고 생각하고 일을 해'


복잡하던 머릿속이 갑자기 차분해졌다.

'전 팀장이 아닌데요... 전 아직 일반 사회복지사고, 저희 기관의 주요 결정은 팀장님이 하셔야 하는 거잖아요... 왜 팀장님도 느끼지 않는 책임감을 제가 느껴야 하죠? 권한은 없고 책임만 주는 그런 말씀은 하나도 위로가 되지 않아요.'


항변하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나중에 내가 팀장이 되고 나서야 그가 왜 그렇게 힘들어했는지, 무단결근을 할 만큼 압박에 시달렸는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결국, 애정했던 실버인력뱅크를 퇴사한 이유도 아마 그와 같은 것이었으리라.

 최대 예산이 투입된 자원봉사 발표대회 최종 리허설

나는 입사 4년 차에 팀장이 되었고, 과연 직원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팀장인가 자주 생각했다.

과장님들도, 다른 선배님들도, 직원들도 참 좋은 팀장님이라고 말했지만 (말 뿐이었을 수도...) 주변에서의 평가보다 스스로에 대한 평가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자주 나를 되돌아보았다.

팀장이 되고 더 많은 신규 사업을 추진했고, 규모를 키우면서 더 많은 예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많은 사회복지재단에서의 공모사업에 지원해 다양한 분야에서 어르신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활동 범위를 넓혔고, 그만큼 수상과 상금으로 보상받았다.


하지만 이제 한계였다. 스스로 느낀 한계.

사업 규모가 점점 커지고 투입 예산이 억 단위를 넘어갈수록, 이에 대한 부담감이 커졌고 내가 '책임자'로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음을 꺠닫는 순간,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입사했을 때의 팀장님이 조금 더 계셨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안정적으로 일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좀 더 길었더라면.

아니, 차라리 좀 더 천천히 승진을 했더라면 내 능력의 한계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생각했다.


팀장이 되기엔 너무 성급했고, 한계를 극복해 내기엔 경험이 너무 적었다.

나를 향한 주변의 신뢰는 오히려 독이 되었고, 하고 싶은 사업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율과 기회는 부담으로 되돌아왔다.


왕이 되려는 자,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이 유명한 말을 스스로 체감하게 될 줄이야.

준비되지 않은 채 왕관을 먼저 쓰고, 무게를 견디지 못해 결국 퇴사했지만, 그 시간은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다른 사람들의 10년 치 경험을 5년 만에 후다닥 정신없이 압축한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얻은 지혜는

무엇이든 순서가 있고 어떤 일이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

작은 기관이었지만 한 조직의 중간관리자는 준비 없이 그냥 사람만 좋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

좋은 직원이 당연히 좋은 팀장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좋은 직원은 해 보았으니, 이제 좋은 팀장이 되어볼 차례다.

이전 08화 또라이에 대처하는 미친년의 자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