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값 못하는 월급루팡의 (부러운) 하루
한동안 월급루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적이 있었다.
월급루팡이란 말이 없었던 시절에도 월급루팡들은 어디에나 살고 있었고, 예전에는 그들의 루팡 생활이 한없이 한심하고 괘씸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렇게 살 수 있는 그 사람의 성향과 대담함이 부럽기도 하다.
회사원들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을 보며 안정감을 얻은 대신, 어떻게 하면 일을 덜 하고 월급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 내내 눈치를 본다.
사업자들은 스스로 움직인 만큼 수익을 얻는 대신 (이것도 보장되진 않지만), 누가 일을 더 많이 하고 누가 적게 하는지 눈치 보는 스트레스에서는 해방된다.
회사원과 사업자 중 누가 더 행복할까? 각자의 장단이 있는 부질없는 비교이긴 하지만 회사원의 삶만 살아본 나는 월급루팡을 지켜봐야 하는 스트레스가 꼬박꼬박 들어오는 월급보다 더 컸던 시절이 있었다.
사회복지사라면 단연 운전면허 1종 보통은 필수이다.
사업을 하려면 수시로 출장을 가야 하고, 여차하면 주간보호센터 어르신들 송영(유치원의 픽-드롭과 같은 개념) 서비스까지 맡게 될 수 있어 큰 차를 운전해야 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요즘은 큰 차라도 오토 차량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1종 보통 면허가 주는 자부심은 복지관 종사자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복지관 개관 직후, 노인일자리사업팀의 팀장 일 때 일이다.
노인일자리사업은 일자리에 참여하는 어르신들 관리뿐만 아니라 이들이 활동하는 수요처 관리도 업무 중 하나였는데 당시 관할 지역이 넓다 보니 수요처 역시 넓게 분포해 있었다.
신규로 입사한 직원 A는 이제 갓 대학교를 졸업한 사회 초년생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운전면허증이 없었다.
기동력이 필수인 노인일자리사업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차량 운전이 필수였기 때문에 면허 취득을 전제로 채용했던 직원이었다.
하지만 당장 면허를 따고서라도 혼자 운전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단 학원을 먼저 등록하고 운전이 익숙해질 때까지는 내가 동행해서 출장업무를 처리하기로 했다. 그도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차량 운행이 어려운 직원들을 위한 공용 교통카드를 구비해 놓아 버스를 이용하도록 했다.
당시 수요처는 초등학교부터, 유치원, 공공기관등으로 사업단별로 다양했는데 수요처 협약부터, 관리를 위한 간담회, 참여자 근태 관리 등으로 월 2~3회는 기본으로 출장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신규 직원이었던 A 사회복지사는 사업이 시작된 직후,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해야겠다며 학원을 알아보는 데에 열중했다. 빨리 면허를 따서 독립적으로 일을 해 보고 싶었겠지.
그런데 사업이 시작된 지도 한참 지났는데 점점 면허 이야기가 쏙 들어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그러고 보니까 내가 A의 운전기사가 돼버렸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말 그랬다.
A의 출장 업무가 있는 날이면, 오히려 내가 더 바빠졌다. 본연의 나의 업무에 더해 A와 시간을 맞춰 출장을 갔다가 다시 돌아와야 했기 때문이다.
면허를 언제 딸 거냐, 시험은 쳤냐, 붙었냐, 떨어졌냐, 묻기도 애매해서 참고참고 또 참다가 말했다.
'A선생님, 면허는 어떻게 됐어요? 학원은 다니고 있어요?'
그녀는 말했다.
'아뇨~ 전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괜찮아서요~ 천천히 따려고요.. 좀 더 알아보고 필요할 때 하죠 뭐'
뭐라고???? 필요할 때???
차량 없이 버스를 타고 관내를 누비면서 일을 하는 게 전혀 불편하지 않다는 그녀를 보고 벙찐 내게 그녀가 또 말했다.
'전 지금도 불편하지 않아서요~'
속에서 천불이 나기 시작했다.
'아니, 이것아.. 네가 불편하지 않은 건 내가 지금 운전기사 노릇을 하고 있어서 그런 거잖아... 설사 버스 타고 다니는 게 괜찮다 해도, 30분이면 갔다 올걸 버스 타면 2시간 걸리는데 그럼 그동안 너의 일은 어떻게 할 건데?'
A가 자리를 비운 사이, A에게 맡겨진 업무는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고, 그게 일 년에 한두 번 있는 일이 아니라 거의 일주일에 두세 번 있는 일이라면 A에게 운전면허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동료들을 배려하는 필수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운전면허취득이라는 전제 하에 채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료들에게 그 불편을 떠넘겼다. 주변 동료들은 그녀의 면허증 취득이 시급하다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만 '운전면허증'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모두가 남은 업무에 치여 복지관 불이 자정이 넘도록 꺼지지 않는 날이 계속될 때였다.
저녁 먹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말 그대로 일 할 '시간'이 부족했던 그 시기.
6시 퇴근시간이 되면, 1차 퇴근할 직원들이 가고 남은 직원들끼리 업무를 처리하던 어느 날,
직원 A가 안보였다.
퇴근한 건 아닌 거 같은데 어디 간 거지?
항상, 6시쯤 되면 사라졌다가 8시쯤 또는 저녁을 먹을 때쯤 나타났다가 홀연히 퇴근하는 그녀의 행방이 궁금해지던 찰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녀를 마주했다.
당시 물리치료실 운영을 함께했던 복지관이라 퇴근 후 치료실 운영일지를 가지러 물리치료실에 갔더니 그곳에 그녀가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따뜻하게 전기장판을 틀어놓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었다.
'????????????????'
그녀보다 내가 더 당황했다. 순간 상황파악이 안 되어 왜 이곳에 그녀가 있는지, 어디가 아픈지 걱정이 되던 찰나에 아픈 게 아니라 쿨쿨 자고 있다는 사실에 한번 당황했고, 태연히 침대에서 내려오는 그녀의 태도에 두 번 당황했다.
왜 굳이 퇴근하지 않고 여기서 잠을 자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보니 그동안 시간당 지급되는 시간 외 근무수당을 지급받기 위해서 퇴근하지 않고 기관에서 시간을 보내다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사실이 발각된 후 직원들에게는 또 하나의 업무가 추가되었다.
야근을 할 사람들은 업무 종료 후 어떤 일을 할지 그리고 전날 어떤 일을 했는지 정리해서 부장님께 보고하는 것.
말로 보고를 대체할 수 없으니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또 문서를 만들어야 하는 불필요한 업무가 하나 더 추가된 것이었다. 직원들의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겉보기에 그녀는 너무나 태연했고, 결국 그녀는 스스로 퇴사를 하고 나갔다.
20대 초반의 어린 직원이었던 그녀가 수많은 인생의 풍파를 겪고 생의 이치를 통달한 여유를 체득한 것은 아니었을 테고, 타고난 성격 자체가 그러했을 것이다.
본인이 편한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남의눈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좋은 말로 포장했지만 진짜는 이기적인 사람.
돌이켜 보면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복이라는 생각도 든다. 주변은 힘들지라도 본인은 세상 편하게 직장 생활했으니.
나도 경험이 많지 않은 팀장이었을 때라, 이런 직원과 어떻게 함께 가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고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뾰족한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른 점 중의 하나는 타인에게 내 기준을 들이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도 기본은 해야 할 거 아냐??!
내가 이런 밥값 못하는 루팡들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함께 근무했던 동료는 내게 말했다.
기본의 기준이 뭔데?
네가 생각하는 기본과, 그녀가 생각하는 기본은 달라~ 모든 사람이 팀장님의 기준과 같을 거란 편견을 버려야 해. 내 생각에 팀장님의 기본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높아.
그렇다.
내가 아닌 타인을 내 멋대로 바꾸려 하고 내 기준에 맞지 않다고 틀리다 매도하는 건 옳지 않다.
누가 봐도 잘못된 행동이라도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를 내 입맛에 맞게 내가 만든 모양으로 예쁘게 빚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후 공무원이 되어서도 수많은 루팡들을 만나고 분노하고 스트레스받고 비난해 봤지만 역시 힘든 건 나뿐, 정작 본인들은 너무나 평온하게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어디에나, 어느 때나, 어느 직종에나 밥값 못하는 사람들은 월급루팡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회사라는 조직은 이들을 포기 또는 포용하면서 동료들의 희생을 암암리에 강요하면서 돌아가고 있다.
나도 혈기왕성한 초년생 시절에는, 이는 너무 부당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분노했지만 어느새 나도 모든 사람은 같을 수 없다는 번지르르한 말로 무력감을 포장한 채 회사를 다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후배들의 저 사람 진짜 루팡이에요~라는 불만 섞인 투정에 그냥 그러려니 해~라고 답하기엔 너무 모양 빠지고, 나도 루팡이 되고 싶어~라고 하기엔 너무 낯 뜨겁다.
모든 직장인들은 나와 같은 마음이지 않을까?
내가 밥값 못하는 루팡이 될 자신은 없지만, 솔직히 부끄럽게도 그들의 루팡 생활은 오히려 부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