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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Oct 14. 2024

(03) 무사 단정지엄수과?

(단편소설) 열세 살 나의 연못 03




다음날 오전 내내 걸어서 도착한 곳은 큰 마을에 있는 중학교다.

아직 여름방학이라 운동장은 텅 비어있고, 구석 연못엔 이끼가 잔뜩 올라와 있어 물속에 담겨있을 하늘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나는 선생이 한 명이라도 있길 바라며 건물로 들어서 교실과 교무실을 차근차근 살폈다.

복도를 조금 걷다 보니 드디어 유리창 너머 한 교실에서 젊은 남자 선생이, 낯선 사람이 복도에서 자기를 쳐다보는 줄도 모르는 채 정성껏 글씨를 쓰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미닫이 나무 문을 열었다.

고요한 복도에 도르래와 철사 부딪히는 소리가 그야말로 요란하게 울리고는 마지막에 꽝! 하며 문이 덜컥 열렸다.


그 소리에 선생은 어찌나 놀랐던지, 양쪽 어깨가 귀 가까이 바싹 오므라들었, 동그랗게 커진 두 눈과 오므려진 입모양이 꼭 부엉이 얼굴 같았다.

선생은 열린 문 뒤에 서있는 사람이 아직 어린 소년인 것을 보고서야 어깨를 내리더니, 이내 두 눈을 부릅떠 목청껏 소리쳤다.


“누게냐! (누구냐!)


나는 ‘웃뜨르(윗들녘)’ 마을에서 온 누구라고 말하며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허리 숙여 인사한 후, 졸업한 국민학교명, 나이, 집안 형편 학교에서 무슨 일이든 시켜주면 열심히 하겠다는  을 구구절절 토해냈다.


그런데 선생은 내가 열변을 토하는 도중에 흥미를 잃어버리고는 어지러운 숫자들이 잔뜩 써진 공책 위에 숫자들을 써 내려가며 제대로 듣지를 않았다.

나는 애가 바짝 타 “선생님.”하고 불렀다.

선생은 마치 아무 소리 안 들린다는 듯이 자기 할 것만 하며 나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였다.

나는 약이 올라 이번엔 멀리 있는 사람을 부르듯 있는 힘껏 “선생님!”하고 외쳤다.

선생은 다시 한번 화들짝 놀라, 아까와 똑같이 부엉이 같은 표정이 되어서는 어깨가 귀 가까이 바싹 올라붙었다.

“뭐냐!”

선생이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이추룩 사정 얘길 허염신, 무사 듣는 척도 안 허염수과? 예?”

(이렇게 사정얘길 하는데,  듣는 척도 안 하세요? 예?)


나는 애가 바싹 타 발을 동동 구르며 말하는데, 선생은 흥! 하고 콧방구를 뀌었다.


“니 허는 말이 하도 우스왕 경햄져. 이래 와보라.”

(너 하는 말이 하도 우스워 그런다. 이쪽으로 와 봐라.)


선생 곁으로 다가서자 선생은 창밖 운동장의 동쪽 끝과 서쪽 끝을 가리키며 말했다.


“니 저디 보염시냐?  끝에서 저 끝까지 담줄 아래영, 저짝 구석에 이신 연못 사방에 검질들 코콜히 다 고, 여기 선생들이영 직원 사무실 매날 청소허곡, 학교 전체 쓰레기 모은 거 다 불 소르고, 밤에는 숙직도 허여사는디, 생각해보라.

아직 어린아이가 어떵 그걸 허여지커니?

경허난 나 우스왕 안 들엄져.”

(너 저기 보이냐?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담장 아래하고, 저쪽 구석에 있는 연못 사방에 잡초들 깨끗이 다 고, 여기 선생들하고 직원 사무실 맨날 청소하고, 학교 전체 쓰레기 모은 거 다 불 사르고, 밤에는 숙직도 해야하는데, 생각해봐라.

아직 어린아이인데 어떻게 그걸 할 수 있겠니?

그래서 나 우스워서 안 듣는 거다.)



나는 ‘학생 대 선생’이나 ‘아이 대 어른’이 아닌 ‘인간 대 인간’이라는 심정으로 선생의 눈을 간절히 쳐다보며 말했다.


“나 검질도 잘 고 쇠촐도 잘 비는디, 무사 시켜보지도 안 허영 못헐 거랜 단정지엄수과?

학교만 다녀진덴 허민예, 뭐든지 헐수 이서마씨.”

(나 잡초도 잘 고 풀도 잘 베는데, 왜 시켜보지도 않고 못할 거라고 단정지으세요?

학교만 다닐 수 있다고 하면요, 뭐든지 할 수 있다고요.)


표정도 말도 없이 나를 잠시 쳐다보던 선생은 내게 부모님이 계시냐고 묻고는, 둘 중 한 분을 모시고 다시 오라고 말했다.



다음 날 어머니와 함께 선생 앞에 섰을 때, 선생이 어머니에게 ‘얘가 이걸 하겠다고만 하는데, 어머니 생각은 어떠시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애가 어리긴 해도 밭에 데리고 가면 풀도 어른 몫만큼 베고, 자기 입으로 한다고 한 건 꼭 지키는 아이’라고 선생에게 말했다.

어머니가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하는 말을 들은 건 그때처음이다.

선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게민 석 달만 시켜 봥 예, 잘 허민 계속 허멍 내년부턴랑 학교도 시키는 걸로 허곡, 잘 못허민 그때랑 왕 데령가부는 걸로 헙서.”

(그러면 석 달만 시켜보고요, 잘 하면 계속 하면서 내년부턴 학교도 다니는 걸로 하고, 잘 못하면 그때는 와서 데려가버리는 걸로 하시죠.)



그날로 나는 큰 마을 중학교의 임시 급사(잡무원)되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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