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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원 Oct 21. 2024

(08) 가엾긴 뭐가 경 가엾나?

(단편소설) 열세 살 나의 연못 08




어느덧 '임시 급사(잡무원)'로 지낸 지 거의 석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지 계속 있으면서 내년에는 학교에도 등록을 하라고 할지, 결판날 때가 되어가는 것이다.

아무리 궁금해도 내가 먼저 초조하게 교감 선생이나 수학 선생에게 물어보는 건 참아야 할 것 같아, 나는 오직 매일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숙직실에서 신문을 목각으로 철하려는데, 교무실에서 걷어 가지고 올 때까지만 해도 아직 바스락거렸던 종이들이 교문 주위를 쓸고 오는 사이 축축 늘어져 있었다.

창밖을 보니 살짝 흐리기만 했던 하늘에서 늦가을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언젠가처럼 신문 철도 다 하고 읽기도 다 했는데, 숙직하는 선생이 나타나지를 않았다.

당번 책을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체육 선생 순번이었다.

시간도 깊을 대로 깊었으니 또 안 나타날 게 뻔하다고 생각하면서 숙직실에 이불을 폈다.


그러곤 라디오를 틀려는데,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저번처럼 창문 밖이 아닌 숙직실 입구 문 너머에서 젊은 남자의 장탄식이 들렸다.


“하…… 인생이 가엾다.”


음산하고 처량맞은 목소리하고는... 체육 선생이 문밖에서 장난을 치는 게 틀림없었다.

나는 팔짱을 딱 끼고 맞은편 벽에 기대어 앉아 입구가 뚫어질 듯 노려봤다.

체육 선생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먼젓번 일도 있고 해서 아무 소리도 내지는 않았다.

조금 있으니 아까 들렸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다시 크게 들렸다.


“하…… 인생이란 슬프다.”


소리가 세 번 날 때까지 숨죽여 기다리고 있으니, 조금 더 크게 목소리가 울렸다.


“인생이 가엾다, 인생이 가여워.”


체육 선생인지 누군지, 나는 성질이 나서 소리를 냅다 질렀다.


“가엾긴 뭐가 경 가엾나?”

(가엾긴 뭐가 그렇게 가엾냐?)


문밖의 목소리는 저번처럼 내 말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 우울한 목소리로 했던 말만 반복했다.

난 그 ‘가엾다’ 하는 소리에 성질이 났지만, 문밖에는 나가면 안 되니 안에서만 씩씩거릴 뿐이었다.

얼마 후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며 세상천지에 비 오는 소리와 내 숨 소리만 남았다.


나는 이번엔 흥! 하고 콧방귀를 뀐 다음, ‘내일 할 일도 천지인데, 괜히 잠 못 잘 일 있냐?’라고 생각하고는 대자로 드러누워 잠을 푹 자버렸다.

체육 선생이 아침까지 나타나지 아니한 건 당연지사다.


아침 일찍 교문 입구를 쓸고 비내린 운동장의 물웅덩이를 고르며, 등교하는 선생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하면서도 나는 간밤의 일을 그 누구에게도 일언반구 하지 않았다.

가엾다, 가엾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서, 모두 집으로 돌아간 시간에 혼자 학교에서 잠을 자는 건 가여운 일인가?

내 또래 학생들이 교실에 앉아 있을 때 빗자루를 들고 구석구석 돌아다니는 건 가여운 일인가?

일요일마다 갈아달라는 선생들의 밭을 갈아주다보니 집에도 못갔다온 건 가여운 일인가?

화가 나서 속이 상한지, 속이 상해서 화가 나는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도 묵묵히 오전 내내 연못 주변에 우거졌던 풀들을 다 베고 떨어진 낙엽들까지 싹싹 긁어모아 버리고 나니 ‘가엾다’ 하던 목소리가 잊히며 가슴이 시원해졌다.

‘내가 일만 잘하면 정식 급사도 될 수 있고, 다음 학기부턴 공부도 할 수 있는데 뭘!

이번 주엔 절대 아무 밭도 갈아주지말고, 꼭 집에 갔다오자.’

이런 생각을 하며 연못을 굽어보니 한층 투명해진 물 위에 하늘과 내 얼굴이 겹쳐져서 일렁이는데, 하늘은 말갛고 내 얼굴도 해사했다.


그날 저녁 빈 교정과 교문 주위를 다 쓸고 학교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나는 하마터면 눈물이 나올 뻔했다.

교문 맞은편 길목에 서서 언제부터 날 바라보고 있었던 걸까... 나는 빗자루를 내팽개치고 달려가면서 큰소리로 외쳤다.


“이모!”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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