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씨를 쓰든 바늘을 잡고 실 뜨개를 하든 기타를 잡고 손으로 치든, 그리고 노트북으로 타자를 치는 것 까지도.. 심지어 이것저것 집을 정리하는 일도 좋아한다.(하지만 설거지와 요리는 빼고 싶다)
내가 이것들 중 단연 좋아하는 것은 필사이다.
무언가 마음이 심란할 때, 어딘가에 집중하고 싶을 때, 책을 읽고 좋아하는 구절을 만났을 때
내 옆엔 항상 뚱땡이 필통이 입을 쫘악 벌리고 어서 펜 하나를 집어 들라고 대기하고 있다. 그럼 난 이리저리 뒤적거리다가 꺼내 놓은 노트의 표면과 궁합이 잘 맞을 만한 펜을 고르고 그 노트에 한번 먼저 써 본 뒤에 본격적인 필사를 한다.
매일 쓰는 다이어리엔 그날 있었던 일들이나 꼭 해야 하는 일들을 적고 책을 읽다가 기억하고 싶은 문장이나 문단에 밑줄 그은 것들은 따로 지정한 필사책에 그 글귀들을 써내려 간다. 영어 필사책엔 영어 공부를 하며 영문필사를... 그리고 또 다른 영역인 영문 필기체도 연습한다. 이 처럼 손으로 쓰는 행위를 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 쓰는 일에 집중하게 되고 어느새 잡념들이 달아남을 깨닫는다.
책을 그냥 읽는 것도 좋지만 필사와 병행할 때가 훨씬 집중이 잘 되고 깊이 있게, 곱씹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좋은 글을 읽고 쓰는 행위가 반복되면서 내가 내뱉는 말의 질도 달라질 수 있다. 좋은 인풋이 있으면 당연히 좋은 아웃풋으로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필사와 필기도구.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의 관계이다.
어릴 때부터 학용품 중 문구류를 좋아했던 나는 기분이 다운될 때나 우울감이 밀려올 때면 어김없이 문구점이나 서점의 문구코너에 가서 이것저것 펜들을 살펴본다. 이미 가지고 있는 펜들도 많이 있지만 가끔씩 내가 몰랐던 새로운 펜들을 보면 너무 설레고 눈이 저절로 커진다. 나의 볼펜 역사의 처음 시작은 아마 JETSTREAM(제트스트림 0.5)이었던 것 같다. 순수하게 잘 미끄러지는 펜 하나면 충분했었다. 그런데 필사를 하면 할수록 펜 욕심도 점점 커지면서 지금 나의 펜 꽂이에는 브랜드별로 색깔별로 길죽이 펜들이 옹기종기 가득 들어차있다. 다 쓰지 못해도 보고만 있어도 배부른.
아이들 새 학기가 되면 내가 더 설렌다. 새로운 노트나 필기구들 그리고 학용품들(가위, 풀, L자파일, 수정테이프, 15cm 자, 형형색색 포스트잇, 북 클립 등등..) 쇼핑하는 즐거움에 하나하나 담다 보면 어느새 장바구니에 수북이 쌓여있다. 그래서 난 다이소에 가면 도무지 헤어 나올 수가 없다. ㅎㅎ
필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첫째가 7살.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영어를 접하게 한 시점인 2019년부터 지금까지 햇수로 6년째이다. 엄마표 영어의 출발점인 Oxford Reading Tree(ORT)를 필사하면서 내 영어공부도 같이 병행하게 됐다. 펜으로도 많이 쓰지만 특히 연필이나 샤프로 사각사각, 서걱 스걱, 슥슥 스으윽—— 종이 위에 써지는 소리를 들을 때면 그 가느다란 연필이 명상을 해주기라도 하듯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면서 영어 쓰기에 재미가 붙었고 인스타에서 같이 영어공부하는 친구들의 추천으로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다는 만년필의 세계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무언가 한번 빠지면 끝을 봐야 하는 성격인지라 만년필의 세계는 나의 또 다른 도파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지금은 조금 수그러들어서 4종류의 만년필(만)을 보유하고 있고 만년필의 앙꼬 같은 존재인 잉크는 또 깔별로 (약소하게) 10개 정도?? 보유하고 있다. 다시 불붙으면 위험해지니 조절하며…
내가 필사를 할 때 필요한 준비물로는 필사하고 싶은 책과, 손바닥 사이즈의 노트와(더 커지면 채워야 하는 부담감이 있다) 좋아하는 펜(뚱뚱이 필통) 그리고 마음 편안해지는 2시간짜리 가사 없는 플레이리스트, 그리고 그날 기분에 맞는 커피만 있으면, 난 1년 내내 행복할 것 같다. 만약 플레이리스트가 1시간이라면 다시 처음으로 그리고 또다시 처음으로 리셋하며 시간을 되돌려 놓을 것이다. 이렇게 열심히 쓰다가 문득 펜의 잉크가 닳아지는 걸 보면 이만큼 뿌듯함이 또 없다. 까맣게 때로는 그날의 기분에 맞는 색으로 쓰인 나의 손때 묻은 책과 노트는 그냥 나 자신 같기도 하다.
*리추얼(Ritual) 매일 지켜내는 일상 속 작은 약속
‘자신의 몸과 마음에 오롯이 집중해 평범한 일상 속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를 루틴으로 반복하는 것’
'필사'가 바로 나의 의미 있는 의식이자 명상이며 가치를 담아주는 안식처 같은 행위이다.
난 오늘도 내일도 필사와 함께 하루를 채워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