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대화의 행복
국어사전에서 ‘대화’를 찾아보면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고 뜻풀이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화 상대는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라는 건데, 평소 내가 제일 대화를 많이 나누는 상대는 누구인가요? 특히 속엣말을 나눌 수 있는 상대는 누구인가요?
요즘은 가족들 사이에서도 많은 대화가 이뤄지는 경우가 드물지요. 그러다 보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한 지붕 아래 살고, 한솥밥을 먹어도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를 나눠야 지금 마음 상태가 어떤지, 뭐에 관심이 있는지, 몸은 어디가 아프지는 않은지 알 수가 있잖아요.
친구도 그렇습니다. 자주 만나 소소한 대화를 많이 나누는 친구와는 매일 만나도 매일 할 얘기가 이어지지만, 어쩌다 만나거나 문자로 안부나 전하게 되면, 더 이상 깊은 얘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대화보다 문자를 많이 사용하게 되면서 감정 전달이 어려우니까 이모티콘을 함께 쓰게 됐을까요. 대화는 문자와는 다르게 대화 내용뿐 아니라 알게 모르게 표정과 목소리에 묻어나는 많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지요. 대화는 서로의 눈빛을 마주 볼 수 있게 하고, 대화 내내 몸짓 등 반응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자로 업무연락만을 하는 직장은, 따뜻한 사람냄새나는 분위기보다는 사무적인 분위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직원들끼리 일 안 하고 마치 수다 떠는 것처럼 보여도, 잠깐 차라도 한 잔 하면서 어제 본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얘기라도 나누는 사무실의 분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명절 때 모처럼 가족이 모여서 대화랍시고 대뜸 정치얘기를 화제로 꺼내서 서로 자기주장만 하는 것도 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경우 싸움이 될 때가 많지요.
그러고 보면 현대인들의 네트워크는 글로벌 단위로 엄청 커졌지만, 오히려 진정한 대화를 할 기회나 상대를 많이 잃어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화 내용이 별 게 아닌 것 같아도 대화를 하면서 공감을 하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되면, 서로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또 속상하고 화나고 힘들었던 응어리들도 풀려나가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현대인들은 마음이 아플 때가 많지요. 자신의 속 얘기를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나 상담사, 심지어 소위 ‘점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한테나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특히 혼자 사시는 분들 중에는 ‘입에서 곰팡내 난다’고 할 만큼 대화 없는 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적지 않은데, 그러다 보니 대화하는 방법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어쩌다 대화의 기회를 얻게 되면 자기 얘기를 하느라 남의 얘기를 들을 틈이 없습니다. 혹은 대화를 할 때 공감을 하지 못하니까, 대화를 할 수 있는 얘깃거리는 다양해도, 얘기가 뚝뚝 끊기거나, 얘기 사이에 침묵이 길어지게 됩니다. 말하자면 형식만 대화인 경우입니다. 대화는 일단 내 마음을 열지 않으면, 시작해도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경로당 화법’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경로당에 가보면, 어르신들이 분명 서로 마주 보고 얘기하시는데, 서로 각자 당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일방통행식 대화’를 하는 분들이 적잖이 계세요. 대화가 고파서 서로 말을 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나누는 대화가 아니라, 각자 자기 할 말만 하는 거니까 당연히 제대로 된 대화라고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단톡방에서 서로 각자의 말만 써서 올리는 것을 이런 ‘경로당 화법’이라고 한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대화 속 단어 몇 개만 알아듣지만, 주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차라리 더 나은 대화 상대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 반려견이나 반려묘를 키우는 분들 중에는 가끔 가족이나 친구에게도 하지 못하는 감정 표현을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 한다고 하지요. 가령 ‘외롭다, 쓸쓸하다, 우울하다, 섭섭하다, 죽고 싶다’ 이런 말은 가족이나 친구에게는 신경 쓸까 봐하지 못하지만, 반려견이나 반려묘에게는 “오늘 너무 우울하다”, “사람들이 날 너무 힘들게 한다”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넬 수 있다는 겁니다. 반려견이나 반려묘는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늘 함께 생활하다 보니 주인의 음성이나 표정, 분위기 등에서 본능적으로 주인의 기분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주인의 기분이 가라앉아 있으면 반려견이나 반려묘도 조용히 옆을 지키면서 마치 ‘그 기분 알아, 기운 내’ 하는 듯이 핥아주면서 위로를 해주지요.
최근에 저는 어깨가 뭉쳐서 남편이 어깨를 풀어주는데 아파서 끙끙 신음소리를 냈더니, 옆에서 반려견이 같이 끙끙대는 거예요. 그러다 남편이 단단하게 뭉친 부분을 눌러서 저도 모르게 ‘아야야’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는데요. 반려견이 ‘아야야’하는 소리를 알아듣고 놀라 벌떡 일어나서 남편에게 월월 짖기 시작했습니다 ‘왜 엄마를 아프게 하냐’는 항의겠지요. 문득 반려견이 참 대견하고 의지가 됐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반려견이나 반려묘가 그렇게 대화 상대 아닌 대화 상대가 되어, 힘들 때 위로가 되고 위안과 힘을 준다고 해도, 이들은 제대로 된 대화를 통해 구체적인 해결방법은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에 비하면 요즘 어르신들에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인공지능 스피커는, 어르신들과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어르신들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까지 해준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어르신들의 말씀 중 부정적인 단어가 반복되면, 이를 기반으로 심리상담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선별해서, 심리상담을 받도록 해준다는 건데요. 그러니까 인공지능 스피커가 어르신들의 대화상대가 될 뿐 아니라 어르신의 심정도 파악해서 그에 맞는 설루션(solution)도 제공하는 겁니다.
얼마 전 저희 프로그램에 참여하신 남자분이, 인공지능 스피커가 저희 프로그램을 틀어줘서 듣고 있다고 하시면서, 인공지능 스피커 자랑을 한참 하셨습니다. 요즘은 라디오 방송을 라디오를 통해 듣는 분들이 거의 없지요. 예전에는 다들 집에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카세트 라디오가 있어서 그걸로 라디오 방송을 들었지만, 요즘은 자동차 안에서나 장착된 라디오를 틀어서 듣지, 다른 곳에서는 대개 스마트폰이나 pc로 듣는데요. 집에 라디오도 없고, 스마트폰에 앱을 까는 것도 해보지 않아 어렵다고 느끼시는 분들은 라디오 방송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 분도 그런 경우였는데, 인공지능스피커에게 라디오를 틀어달라니까 라디오를 틀어줘서, 저희 프로그램을 듣게 됐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친김에 저희 프로그램에 전화도 걸어달라고 해서, 참여신청까지 했다는 겁니다. 이쯤 되면 인공지능 스피커 앞에 ‘반려’라는 말을 감투로 씌워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1세대 인공지능스피커가 이 정도면 앞으로 십 년 후 2십 년 후 맞이하게 될 좀 더 발달된 인공지능스피커나 인공지능로봇은 어쩌면 우리와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면서, 지금과 같은 ‘반려봇’의 위치를 넘어 가장 친한 '베프'나 '효자 효녀'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하긴 지금도 챗지피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은 글도 잘 쓰고 작곡도 하고 그림도 잘 그리잖아요. 문득 이러다 대화의 본질이 달라지는 게 아닌가 우려도 됩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화보다 문자로 소통하는 게 마음 편하다고 하잖아요. 이런 식으로 세상이 변하다 보면, ‘대화’가 ‘마주 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란 뜻이 아니라, ‘인공지능을 상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음’이라는 뜻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입니다.
사실 사람 사이의 대화는 쉽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의 감정과 듣는 사람의 감정이 얽히면서 여러 상황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적어도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려면 내가 마음 문을 열 뿐 아니라 상대도 나에게 마음 문을 열 때까지 서로 시간과 노력의 품을 들여야 합니다. 그런 사이가 되면 대화를 나눌 때 말소리나 억양에도 상대의 기분을 알아차리고 공감을 극대화시킬 수 있지요.
오늘 누구와 얼마나 대화를 나누셨나요? 대화상대는 저절로 생기는 게 아니라 내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마음 문을 열고 먼저 시간과 노력을 들일 때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건 상당히 큰 행복이고, 가장 좋은 시간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