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메타럽 Sep 05. 2024

볼 빨간 사추기(늙으면 어떡하지?)

2.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요즘은 결혼을 늦게 하고 아이도 늦게 낳아서, 아이가 사춘기(思春期)를 겪을 때 부모도 어느덧 소위 사추기(思秋期)라고 하는 중년에 들어서게 되는 경우가 흔합니다. 예전 같으면 대가족이 함께 살면서 이미 그런 경험이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에게도 자녀에게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로 다독여 줬을 텐데, 핵가족시대인 요즘은 그런 중재인이 곁에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다고 위로와 격려를 받기 원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위로와 격려를 받고 싶어서, 서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기 어렵습니다. 내 마음이 힘드니까 상대의 얘기가 들어오지 않는 거지요. 

 

 그러면서 아이의 ‘대학 입학’이라는 거대 목표 아래, 마치 폭탄 돌리기를 하듯 모든 걸 미뤄 놓습니다. 그런데 미룬다는 건 착각이고 실제로는 '상실'입니다. 아이도 부모도 그 시기에 필요한 대화와 활동을 하고 욕구를 충족시켜야 다음 단계로 자연스럽게 발전할 수 있는데, 그걸 아예 생략해 버리는 거니까요.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어’라는 말로 아이의 모든 욕구를 묵살하고, 스스로도 ‘아이가 대학 가면’이라는 말에 최면을 걸고 지내다간, 이미 둘 사이에 커다란 벽이 생기게 돼서, 아이가 대학에 간 이후에는 오히려 더 대화를 나누지 못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만약 그럴 때 “요즘 어때? 힘든 것 있으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말해 봐. 혼자보다 둘이 생각하는 게 좀 낫지 않겠어?” 이렇게 아이의 마음 문을 두드리면, 아이는 힘들고 무거운 마음을 털어놓게 되고, 그 후에도 죽 자연스럽게 엄마와 대화를 하고 싶어 하게 됩니다. 또 “실은 엄마도 요즘 이런 게 힘들지만 너를 보고 기운을 낸단다. 우리 잘해보자” 이러면 아이도 엄마를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나중에 세상에서 둘도 없이 친한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야, 다들 그렇게 살아. 무슨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라든가 “엄마는 너 만할 때 그런 쓸데없는 생각 안 했어!” 또는 심지어 “엄마 지금 바쁘고 힘들어!”하고 대화를 원천차단한다면, 아이는 그 후 다시는 엄마와 대화하려 들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막상 아이가 대학에 가면 아이는 자기 세계를 향해 날개를 펴고 날아가지만, 부모는 소위 ‘빈 둥지 증후군’을 겪기 쉽습니다. 그동안 부모라는 책임 아래 꾹꾹 눌러왔던 사추기(思秋期) 증상들이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지요. 그러면 마음속에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이런 질문이 뭉게뭉게 피어오릅니다. 


 원래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은 치매 증상과 관련된 유명한 말입니다. 치매가 진행되면 자기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게 되고, 방향감각도 상실하게 되니까요. 중년기 사추기 증상도 비슷합니다. 중년이 되면 신체적으로 갱년기 증상과 더불어 마음도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감정기복이 심해지는데요.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이 왠지 허한 것 같고, 불쑥불쑥 외롭고, 우울하고, 또 그런 감정의 변화를 겪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나 자신에 대해 화도 나고, 그래서 나 자신과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이 싹튼다고나 할까요. 거울을 봐도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이제는 아무리 기능성 화장품으로도 가릴 수 없는 주름과 탄력이 떨어진 피부, 그리고 유난히 돋보이는 흰머리가, 이제 나는 청춘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굳이 굳이 ‘팩트 체크’를 해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남성분들은 흰머리 보다 흰 수염을 발견했을 때 더 철렁하는 느낌을 받는다고 하지요. 


 게다가 나는 아직 늙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더욱이 청춘의 느낌이 뭔지 아직도 생생하게 잘 아는데, 슬프게도 나를 중년이라고 하는 현실과의 괴리가, ‘내가 잘 살아왔나? 맞나?’하고 자꾸 뒤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그래서 문득 청춘을 잃어버렸다는 회환이 들고, ‘아 청춘이여 다시 한번’이라는 자연의 흐름에 역행하는 꿈을 꾸기도 하지요.      

 

 그런데 청춘을 잃어버렸으면 오늘의 내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의 ‘나’는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 청춘을 지나온 ‘나’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그동안 앞만 보면 달려오지 않았나’, ‘그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는 함몰되지 않았나’하면서 너무 나를 몰아붙이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앞만 보고 달리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우리가 살아온 인생에 점수를 매긴다 쳐도, 일단 우리는 살아있는 자체로 기본 점수는 획득했습니다. 우리, 지난 세월을 지나온 우리의 모습을 두고 너무 자책하지 말기로 해요. 우린 보통 사람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대개 다 그래요. 돌이켜보면 후회도 되고, 모자라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습니다. 이 나이 돼서 돌아보니 남들보다 좀 더 나아 보이지 않는다고, 남들에 비해 뒤쳐진 것 같다고 스스로를 할퀴지 않았으면 합니다. 천재라고 일컬어지던 사람들도 다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많았지요. 천재성을 내려놓고서야 행복을 찾았다고 고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년에 찾아온 사추기思秋期)가 질풍노도의 사춘기 못지않게 나를 흔들면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라는 질문을 자꾸 던져도, 나 자신과 현실을 부정하지 말기로 해요. 배도 나오고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하는 중년이라는 걸 인정해야, 현재로부터 제대로 된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습니다. 또 여긴 꿈속, 내가 바라는 곳이 아니라 발 딛고 서있는 현실, 그러니까 누구 남편, 누구 아내, 누구 부모, 또 사회적으로 어떤 직장, 어떤 모임의 누구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내가 있습니다. 흔히 바쁘게 살아오면서 그런 나의 여러 역할에 파묻혀 진정한 나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는데, 역으로 그런 역할도 나의 중요한 일부라는 걸 인정해야 내가 살아온 의미를 잃지 않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급변하는 시대에 그 많은 역할을 하면서 이 정도 살아온 것도 쉽지 않은 일입니다. 스스로에게 점수를 좀 후하게 주세요.      

 

 그리고 때때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회환에 ‘나는 누구?’라는 질문이 마음속에 고개를 들 땐 ‘나는 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나, 내가 사랑하는 나’로 나를 확립시켜 주세요. 그게 바로 정답입니다. ‘여긴 어디?’라는 생각이 들 때는 지금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을 직시하세요. 아무리 남의 인생이 부러워도 그건 그 사람의 인생이고, 나의 인생은 따로 있습니다. 부정하려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요.      

  

 사실 중요한 건 중년 이후 이제부터입니다. 지금 백세시대라고 하잖아요. 제2의 인생, 제3의 인생을 꿈꾸고 실현하는 시대인 만큼, 앞으로의 인생은 지금부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게 됩니다. 따라서 백세인생에 있어서 중년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 인생의 절반 가량을 지나왔을 뿐인데 지나온 과거에 발목이 붙들려 있으면 출발도 제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행복한 미래를 위해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다시 인생의 출발선에 선 중년의 나를 힘차게 응원해 주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