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다시 날아 보아요
연말은 보통 인사이동 시즌이다 보니까 새해가 되어도 인사이동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년 퇴직하고 한참 지난 분들이야 ‘그래, 그땐 그랬지’하고 덤덤하게 얘기할 수 있지만,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은 티를 안 내도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한 때지요. 소위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몇몇 직장과 공무원들을 제외하면, 승진을 하든 승진을 하지 못하든 모두 불편한 마음은 같습니다.
승진을 못한 분들은 ‘이러다 한직으로 내쫓기는 것 아냐?’, ‘이러다 잘리는 것 아냐?’ 하는 두려움으로 마음이 불편하고, 승진을 한 분들도 ‘이거 너무 빨리 승진하는 것 아냐?’ ‘빨리 승진하면 빨리 그만둬야 할 수도 있는데’ 하는 두려움으로, 기뻐도 내심 불편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50+인 분들은 퇴직이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승진은 둘째치고 그냥 나가라고 하지만 않으면 좋겠다’, ‘가늘고 길게 다니는 게 좋다’ 이런 말들도 많이 합니다.
실제 퇴직에 대해 마음의 준비도 못한 채 느닷없이 퇴직을 맞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한 채 맞이하는 정년퇴직도 느닷없게 느껴지는데, 미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맞이하는 퇴직은 얼마나 서늘한 느낌일까요? 직장인들은 대개 하루 중 직장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다 보니, 모든 게 직장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특히 회사가 내 인생의 전부인 양 회사와 집만 오가며, 대인관계도 회사 관련 사람들과만 맺으면서 그야말로 ‘회사인간’으로 살아왔다면, 퇴직과 맞닥뜨렸을 때 더 마음이 답답하고 추울 수 있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조기퇴직하는 사람도 많은데, 정년퇴직을 한다는 건 그 자체로도 참으로 행복한 일이고 칭찬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과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어쩌면 행복이나 칭찬보다 먼저 직함을 내려놓게 되는 자신의 모습이 왠지 초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여태까지는 어딜 가도 그 직함으로 불리면서 그 직함에 맞게 대우받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동안 후광처럼 따라다니던 직함을 떼고 내 이름 석 자만으로 접해야 하는 상황으로 바뀌게 되면, 달라진 현실에 배신감마저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윗자리에 있다가 퇴직하신 분들은, 예전에는 이른바 중요한 일을 하느라 소위 하찮은 일들은 아랫사람들의 도움을 많이 받으셨잖아요. 가령 스마트폰 앱으로 예약하기, 티켓 구매하기, 커피 내리기 등등은 회사에서 제일 막내나 아르바이트생이 주로 맡아서 했을 텐데, 퇴직 후의 현실은 그런 하찮은 일들을 직접 해야 한다는 거지요. 더욱이 전에는 하찮게 여기던 일들을 정작 지금의 자신은 쩔쩔매면서 하지 못하면, 자존심도 상하고 자존감이 뚝 떨어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그동안 자신에게 친절하고 후하게 대해줬던 것은, 나 자신보다도 직장의 명성과 직함의 후광 때문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그래도 그나마 인성이 좋으면 퇴직 후에도 때때로 만나 인사하고 대화를 나눌 사람이 주위에 남아 있지만, 인성도 챙기지 못했다면 주위에 사람조차 없는 깊은 외로움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는 당연한 거예요. 대통령도 그 앞에 ‘전’이란 글자가 붙으면 힘이 빠지잖아요. 얼른 받아들여야 합니다. ‘회사인간’에서 ‘회사’라는 날개옷을 벗어버리면 인간만 남게 되지요. 그 ‘인간’이 그동안 입고 있던 날개옷을 벗었을 때 춥거나 부끄러움 대신 자유로움을 느끼면서, 또 다른 멋진 날개옷을 다시 찾아 입고, 더 멋지게 비상할 수 있어야 바람직한 겁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허탈감과 무기력감에 스스로 초라함을 느끼면서 우울하고 불안하고, 심지어 때때로 화가 나기도 한다면, “아, 지금 내 마음에 ’ 삐뽀삐뽀‘ 비상등이 켜졌구나” 얼른 알아차리고 대처를 해야 합니다. 남들은 나를 어떻게 보든, 우선 나라도 ‘그래, 열심히 살아왔다’고 인정하고 보듬어주는 게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닥에 곤두박질친 내 자존심과 자존감을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하찮은 일들인데도 할 줄 몰라 자존심이 떨어졌다면, 얼른 하는 방법을 배워서 바로 일으켜 세우세요. 또 마음에 녹처럼 끼어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닦아내면 자존감도 다시 빛을 낼 수 있게 됩니다.
누구나 타인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 아닐까 싶어요. 실제 다른 사람들이 다 인정해도 나 스스로가 인정을 못하면 만족감보다 미진한 마음이 크잖아요. 대개 퇴직을 앞두거나 퇴직 후 불안한 마음이 커서 그간 내가 살아온 공적이 바래는 경우가 많은데, 잘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침 일찍 일어나서 만원 전철이나 만원 버스에 시달리면서도 직장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하고 월급을 받아온 노력은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지금 한번 직장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대단했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꼽아보세요. 꼭 승진이나 무슨 상을 받았을 때만 대단한 게 아닙니다. 전날 거나한 회식으로 늦게까지 피곤했지만, 다음날 아침에 어김없이 일찍 출근했던 것도 참 대단한 거예요. 또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이런저런 기분 좋지 않은 일을 겪을 수 있는데, 그러고 나서도 꿋꿋이 계속 직장생활을 한 것도 역시 대단한 겁니다. 월급이 많건 적건 돈을 벌었다는 것도 당연히 대단한 거예요.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우면 ‘땅 파봐라, 돈이 나오나’하는 옛말도 있겠어요?
그러니 퇴직을 앞두거나 퇴직하신 분들은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 자신을 우선 칭찬해 주고 인정하고 격려해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훨훨 날 준비를 하자고 스스로에게 달콤하게 속삭여 주세요. 흔히 제2의 인생을 계획한다고 하면, 먼저 경제적인 준비나 어떤 기술적인 대비를 먼저 생각하는데, 그보다 먼저 스스로를 북돋아 줘야 기운이 나서 그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편 다시 그렇게 멋진 날개옷을 입고 훨훨 날 제2의 인생의 키포인트는 ‘재미’와 ‘보람’이라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책임과 의무에 절어 살아왔는데, 제2의 인생마저도 책임과 의무에 절어 살면 인생이 너무 피곤해집니다. 이미 경험으로 잘 아실 거예요. 학창 시절에도 억지로 공부하지 않고 공부에 재미를 느껴서 하는 친구들이 성적이 좋았고, 직장에서도 즐겁게 일하는 사람들이 좋은 성과를 냅니다. 제2의 인생에서는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분들은 계속 그러시고, 그러지 않았던 분들은 이제라도 그렇게 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재미와 보람이 달성하거나 이뤄내야 할 목표가 아니라는 겁니다. 재미와 보람은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거예요. 지금도 큰 인구집단으로서 늙어가는 우리 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베이비붐세대는, 산업화시대를 지나면서 성공과 소유를 인생의 목표로 살아온 분들답게, 제2의 인생을 설계할 때도, ‘이제는 행복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 즐길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스스로를 자꾸 내몬다고 해요. 따지고 보면 그것도 강박이고, 마음에 짐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 재미있게 노는 아이들은 그냥 신나서 재미있게 노는 거지, ‘나는 이제부터 재미있게 놀아야겠다!’ 마음을 다잡고 작정해서 놀지 않잖아요? 아마 그렇게 딱딱하게 틀에 잡혀서 놀기 시작하면 노는 느낌도 제대로 나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행복은 성공이나 소유처럼 상대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아파트를 몇 채나 가지고 있다 해도 정작 내가 집으로 누리는 공간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하물며 자녀 방에도 잘 들어가지 못하잖아요. 그러니 행복한 제2의 인생, 행복한 제3의 인생을 생각할 때는 마음에 여유부터 채우는 게 우선입니다. 마음을 여유를 갖고 재미를 느끼면서 날갯짓을 하고 비상을 하다 보면 저절로 나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되고, 어느덧 내 비행에 만족하면서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혹시 날갯짓을 해 본 지 하도 오래돼서 겨드랑이가 가려운 줄도 모르고 계신 분들이 계신가요? 우리 함께 푸드덕 날갯짓하면서 힘차게 날아보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