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눈 뜨고 봐야하는 성과
뉴스를 보니 얼마전에 와인을 95% 이상의 정확도로 와인을 ‘가상 시음’하고 분류하는 AI가 나왔다고 하더군요. 흥미로웠습니다. 기후 요소와 성분 분석을 결합한 예측 모델로 와인 품질을 예측하기 시작한 것도 얼마 전의 일인데 이젠 기술로 시음까지 가능하다는 얘길 들으니 뭐랄까요. 그래도 마음 한 켠으론 '그래도 와인 맛은 사람 혀가 제일 잘 알지' 했었는데 제 생각을 고쳐야 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무형의 미각도 손에 잡히는 시대니까요.
조직의 가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기업의 실질적 성과는 재무제표에 담기지 않는 무형의 가치 창출 과정에서 발생합니다. S&P500 상장사의 시가총액 중 무형자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90%에 달합니다. 애플은 92%, 페이스북은 87%에 이릅니다. 반면, 국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는 약 13%, 코스닥 상장사도 평균 48%에 불과합니다. 이는 우리가 무형자산의 인식, 평가, 활용에서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딱 그만큼 저평가받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습니다. 무형 자산에 대한 인식이나 평가 체계가 뒤떨어지는 상황에서 개인에 대한 성과 평가 역시 잘 이뤄질 리가. 이번 회차는 '보이지 않는데 무엇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를 다뤄보려 합니다.
무엇을 측정할 것인가 : 정의와 구성요소
지식 순환 역량(Knowledge Circulation Capability)
조직의 지식 순환 역량은 전체가 하나의 유기체로서 학습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참여하는지를 나타내는 개념입니다. 구성원들의 경험과 정보가 조직 내에서 유기적으로 교환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메커니즘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암묵지가 조직의 형식지로, 다시 형식지가 다른 구성원의 암묵지로 변환되는 과정이 활발할수록 지식 순환 역량이 뛰어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OECD에선 이 과정을 '지적 생태계의 대사 활동'으로 정의하더군요.
지식 순환 역량은 세 가지 요소로 구성됩니다. 첫 번째는 복도 대화나 커뮤니티 같은 비정형 환경에서 발생하는 지식 교환, 비공식 지식 흐름을 말합니다. 수집하고 추출하는 난도가 높지만 경험으로 누적된 통찰과 해법이 적잖이 함유되어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기울일만합니다. 그다음은 지식 재조합 민첩성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기술이나 아이디어를 내부 시스템에 통합하는 속도와 효율성을 의미합니다. 얼마나 빠르게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기존 지식과 결합하여 혁신적 가치를 창출하는가를 보는 거죠.
조직이 물리적 공간과 디지털 플랫폼이 지식 공유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지원하는지도 중요합니다. 여기엔 물리적 레이아웃부터 디지털 협업 도구까지 지식 흐름을 촉진하는 모든 인프라가 포함됩니다. 이게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까 싶지만 사내 이동 경로를 분석해 최적의 지식 교차점을 만들어 부서 간 협업이 27% 증가하는 효과를 얻은 구글의 사례를 보면 자리가 중요하단 생각도 드는군요.
예측적 창의성(Anticipatory Creativity)
흔히 우린 문제가 발생한 후 해결책을 찾는 사후 반응적 접근을 문제해결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예측적 창의성은 그 발생의 앞단을 주목합니다. 문제가 표면화되기 전에 이를 예견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말하죠. 저기 스탠퍼드에서는 '시간을 거스르는 문제해결'로 정의하는데, 혁신의 패러다임이 반응(사후)에서 예측(사전)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시각에서 정의한 게 아닌가 합니다.
예측적 창의성의 첫 번째 구성요소는 '얼마나 민감하냐'입니다. 미세한 신호를 감지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는 조직과 개인의 감각을 통칭하죠. 두 번째는 '실패에 대한 수용량'입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빠르게 검증하고 실패로부터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가를 봅니다. 실패한 연구원들에게 파티를 열어주는 3M, 매달 `이달의 가장 창의적인 실수상`을 선정해서 포상하는 BMW, 연구개발에 실패한 직원들에게도 인센티브를 주는 제약회사 Merck & Co 등은 실패로부터 배우려 드는 좋은 사례입니다.
마지막은 서로 다른 분야의 지식과 관점을 융합하는 능력, 다각성입니다. 다양한 배경과 전문성을 가진 구성원들이 활발하게 창의적 마찰을 발생시킬 때, 그럴듯한 아이디어가 탄생합니다. 다른 말로 혁신이라고 부르는 그것, 맞습니다.
관계적 신경망(Relational Neural Network)
관계적 신경망은 구성원들 사이에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신뢰와 협력의 복잡한 패턴을 말합니다. 관계적 신경망이 촘촘한 조직에서는 부서나 위계 같은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아이디어가 교환되고, 솔직한 피드백이 이루어집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자원과 정보가 자발적으로 공유되죠. 이러한 신경망은 조직의 적응력과 회복탄력성을 높이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관계적 신경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협력 활동의 정도입니다. 구성원들이 공식적인 요청이나 지시 없이도 서로 돕고 협력하는 문화적 성향을 말하는데 자발적 협업은 구성원들의 내재적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더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견 충돌이 발생했을 때 이를 생산적으로 해결하는 부분도 중요합니다. 상호 간 격렬한 토론을 장려하는 분위기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충돌 이후 원만한 해소 과정을 마련하는 게 생산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인간은 논리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거든요.
좋은 아이디어나 실천이 조직 내에서 자연스럽게 전파되고 채택되는 정도도 봅니다. 성공 경험이 조직 내에서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조직은 개별 부서의 성과가 전체 조직의 성장으로 증폭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측정했나: 실제 사례
지식 순환 역량
2011년 MIT 연구팀은 적외선 센서와 블루투스, 음성 인식 기술을 탑재한 웨어러블 디바이스 "Social Badges"로 비공식적 의사소통을 측정하는 실험을 합니다. 대화 빈도, 대화 상대의 위치, 음성 톤 변화를 실시간으로 기록했고 1600만건의 이메일과 병행 분석했습니다. 샘플의 크기(22명)가 적었고 음성인식 기술이 완전치 않아 한계가 있었지만 연구팀은 대면 상호작용의 효과, 네트워크 중개자의 존재, 프로세스의 개선 가능성 등을 엿볼 수가 있었죠.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자발적 지식 흐름의 활성도를 가늠해보려는 시도(도전보단 파격에 가깝다)였다 생각합니다.
우리도 이런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닙니다. 2019년 대한산업공학회 춘계학술대회에 발표되었던 '업무 효율화 개선을 위한 부서 간 협업 진단' 논문을 보면 디지털 플랫폼에 기록되는 데이터를 분석하여 서로 다른 부서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자주 지식을 공유하는지를 정량화해 보자는 제안이 나오거든요. 다소 거칠지만 부서 간 상호작용의 네트워크를 그려낸 도표를 보면 조금은 놀랍습니다. 기술과 도구들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으니 미래는 어찌될지 모르는 일이죠..
예측적 창의성
예측적 창의성을 측정하기 위한 노력도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IDEO는 문제를 인지한 시점부터 첫 실험을 시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추적합니다. 디버깅 레이턴시라고 부르는 이 측정법은 얼마나 빠르게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옮기는지를 보여줍니다. 대응시간이 짧을수록 조직의 실험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의미이며, 미래 문제에 대한 선제적 대응 능력과 직결되는 지표가 됩니다. IDEO의 디버깅 레이턴시는 평균 36시간 내외입니다.
큰 틀에서 3M의 '15% Culture'도 예측적 창의성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습니다. 3M은 전통적으로 직원들에게 근무 시간의 15%를 자유 프로젝트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포스트잇, 스카치테이프, 다층광학필름 등이 '15% Culture'의 결과물이죠. 이 비율은 공식적인 업무 시간 외에 이루어지는 창의적 활동의 양을 측정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쉽지 않은 경영 상황에도 이 비율을 유지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미래의 혁신 잠재력을 유지시키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예측적 창의성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지표로 변환하여 관리 가능하게 만들어 줍니다.
관계적 신경망
관계적 신경망을 측정하기 위한 움직임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에서는 한 통신 회사의 1,100명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Microsoft Workplace Analytics를 사용하여 조직 내 네트워크를 측정한 연구가 진행되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업무량 균형, 협업 과부하, 조직 경직성 및 사일로 현상과 같은 사용 사례를 분석하여 조직의 실제 작동 방식을 더 깊이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직원들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누구와 협업하며, 얼마나 많이 협업하는지에 대한 행동 패턴을 아래와 같이 매핑할 수 있었습니다.
그간 감각적으로만 이해되던 조직 내 관계 역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최적화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이 강구되고 있다는 점은 긍정적인 신호입니다.
무형 자산의 가시화가 만드는 유형의 경쟁력
무형 자산에 대한 투자는 생산성 증가와 지속적인 성장으로 이어집니다. 무형 자산 투자가 높은 기업은 직원 효율성과 혁신 성공률에서 우위를 점하며, 이는 장기적인 성장 동력이 됩니다. 경쟁력과 성장 가능성이 높고, 확장성이 뛰어나며, 학습 경제의 다른 영역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수 있는 무형 자산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높은 수준의 가시성이 필수입니다. 안 보이면 못 잡고, 못 잡으면 저평가를 피할 수 없습니다.
상위 25% 성장 기업들이 하위 50% 성장 기업들보다 무형 자산에 2.6배 더 많이 투자했다는 맥킨지(2021)의 연구는 보이지 않는 가치를 가시화하는 작업이 단순한 학술적 논의를 넘어 실질적인 경쟁 우위의 원천이 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가 분류한 지식 순환 역량, 예측적 창의성, 관계적 신경망이라는 세 가지 무형 자산도 이러한 맥락에서 일정부분 의미를 가집니다.
수집 데이터의 윤리적 활용이나 대안 지표에 대한 고민, 조직의 무형자산과 개인 성과와의 관계성 설정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은 많습니다. 처음부터 완벽히 측정하고 반영하겠다는 조바심보다는 점진적으로 탐색하고 반영시켜 나가겠다는 자세와 접근법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 시작이니까요.
다음 회차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