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된 일자리에서 물러나는 시기는 평균 49.3세이다.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55세부터 79세까지는 52.8세, 55세부터 64세까지는 49.4세이다. 장래근로 희망은 69.4%로 전년 대비 0.9%p 증가했다. 중장년 10명 중 7명이 계속근로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55세 이상 중장년은 평균 73.3세까지 일하기를 희망한다. 55세부터 59세까지는 69.6세, 60세부터 64세까지는 71.9세, 65세부터 69세까지는 75세, 70세부터 74세까지는 78.7세, 75세부터 79세까지는 82.3세이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사회적 은퇴연령은 늦어지고 있다. 그 만큼 일을 더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적연금 수령여부는 51.2%이며 월평균 수령액은 82만원이다(통계청, 2024). 주된 일자리에서 퇴직(49.3세)하면 공적연금 수령까지는 약 15년 정도 공백이 있다. 소득 크레바스 기간이 꽤 길다. 이 시간을 어떻게 잘 보내느냐가 노년 생활의 바로미터가 아닐까 싶다. 평균 근로 희망연령(73.3세)까지는 23년이라는 시간이 기다린다.
일하는 목적이나 일의 개념은 연령별로 다르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 대부분 계속 근로 희망 이유는 경제적 부분을 빼놓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부유함을 목적으로 일을 한다는 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당연한 이치이다. 다만, 통장 잔고가 쌓이는 즐거움에 일을 하는 행위는 60세 정도까지 하면 어떨까 싶다. 73.3세까지 줄곧 ‘돈 버는 기계’로서 경제적 속박(束縛)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인생백세시대이다. 의료기술 발달은 평균수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1970년도 우리나라 평균수명은 62.3세였다. 2023년도 평균수명은 83.5세이다(통계청, 2025). 적극적인 사회․문화활동을 누리기 위해서는 ‘일(job)’의 정의를 마인드셋(mindset)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비록 계속 일하는 의미가 경제적 이유라는 끈을 놓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어찌보면 60세가 인생 전환점이 할 수 있다. 경제적 ‘챙김’에서 사회적 ‘가치’와 ‘보람’으로 방향을 선회해 보자. ‘돈을 번다’라는 무거운 짐을 내려 놓자. 내가 하는 일이 ‘사회적 쓰임새’가 있다고 스스로 위안을 삼는 마음의 안식처를 찾자. 아직 사회는 중장년의 계속근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인프라가 튼튼하지 못하다. 고령층 취업자의 직업별 비중이 현실의 민낯을 보여준다. 단순노무종사자 23.6%, 서비스 종사자 13.8%이며, 관리직이나 사무종사자는 총 9.5% 수준으로 그것도 전년 대비 0.3%p 감소했다(통계청, 2024). 그 만큼 ‘경력활용’ 또는 ‘경력유사’형으로 재취업한다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임금도 최저임금에서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다. 냉혹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된다.
이솝 우화 ‘개미와 베짱이’는 익숙한 내용이다. 어릴 때부터 근면 성실의 본보기로서 자주 애용되었던 학습 교재였다. 60세까지는 ‘개미’처럼 사는 것이 사회가 권장하는 모습이다. 은퇴 전에 충분한 자산 마련은 노후의 안정적 삶의 질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기에 더욱 그렇다. 개미 생활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생백세시대에 풍요로운 노년을 위해 경제적 ‘챙김’에 최선을 다하는 개미 모습에서 우리는 공감한다. 그래야만 한다고 인정한다. 주된 일자리는 자신뿐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곳이다. 신입사원이 1년도 안되어 퇴직하는 사유 중 하나는 연봉과 복지이다. 자신의 경제적 셈법으로는 타산이 맞지 않다는 의미이다. MZ세대라는 것으로 현상을 왜곡할 이유가 없다. 세상이 변했다. 내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자본주의가 팽창하고 깊숙이 자리매김하면서 경제적 부유함이 우선이 되었다. 더욱 열심히 일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앞으로 더 일을 하려고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이 쯤에서 한 번 생각을 곱씹어 보자. 이렇게 계속 ‘돈을 쫓는 자’로 사는 것이 맞는지 말이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아주 오래된 광고 카피가 떠오른다. 60세까지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지금까지 살아 온 삶을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오비체수삼척(吾鼻涕垂三尺)’이다. 내 코가 석자여서 주위를 돌 볼 겨를이 없었다는 말이다. 주위뿐 아니라 내 자신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베짱이’처럼 여유를 가져 보자. 하고 싶은 것, 해보고 싶었던 것에 도전장을 내밀어 보자. 경제적 가치는 우선 순위에서 잠시 미뤄두자. 육십이 넘어 아등바등한다고 예전처럼 통장잔고가 늘지 않는다. 가성비가 예전 같지 않다. 이제는 쓰임새가 사회적으로 가치가 있음에 만족하자. 아직까지 쓰임새를 찾는 곳이 있다는 것에 보람을 찾자. 아침에 일어나서 할 일이 있고, 갈 곳이 있고,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 일은 건강의 마중물이다. 일은 계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말이다. 평생직장시대는 끝났다. 평생직업시대이자 평생취업시대가 도래했다. 일의 개념에 변화를 줄 때라는 점을 명심하자.
60세에 맞이하는 은퇴는 단순히 직장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자녀와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는 ‘내 돌봄’을 자처하자. 은퇴는 지금까지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는다. 질병과 외로움, 그리고 가난의 장수 3대 리스크가 뜻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사회는 아직 3차 산업혁명시대인 2천년대쯤 머물러 있다. 편리함은 4차 산업혁명시대이지만 사고방식은 아직 3차 산업혁명시대의 초기 아니 기껏해야 중기쯤 될 것 같다. 인생백세시대는 위기가 아니고 기회이다. 즐길 준비만 된다면 말이다. 시간은 내 편이 아니다. 시간은 철저한 소비재이다.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재생할 수가 없다. 재활용도 안될 뿐 아니라 저축도 안된다.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엔딩노트에 잘 살았다고 한 줄 적기가 망설여질지도 모른다. 앞만 보고 달려 온 육십년의 세월은 그냥 그대로 두자. 인정하자. 이제는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와 함께 내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에 매진하자. 육십 평생 역량 가치를 숫자로 환산했다면, 지금부터는 주위 사람들이 내 쓰임새로 웃고 흐뭇해 하는 모습에서 보람을 찾자. 이것이 오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일(job)의 정의는 뭘까? 네이버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무엇을 이루거나 적절한 대가를 받기 위하여 어떤 장소에서 일정한 시간 동안 몸을 움직이거나 머리를 쓰는 활동 또는 그 활동의 대상이다. 다른 의미로는 어떤 계획과 의도에 따라 이루려고 하는 대상이다. 일의 정리는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가 된다. 적절한 대가, 일정시간, 활동, 계획과 의도 등이다. 영어 표현으로는 job과 work가 있다. 어떻게 다를까? 분명 두 단어 모두 ‘일’을 지칭한다. 그런데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다. job(일)은 개인 중심적이다. 반면에 work(일)는 사회적 또는 경영학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job(일)은 일자리나 직업, 보수를 받는 일, 직장에서 담당하는 직무 등으로 협의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work(일)는 노동이나 일하는 것, 해야 할 일이나 어떠한 활동을 수행해야 하는 작업, 일하는 과정 등으로 구분되어 진다. 같은 듯 다르다.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일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권리와 의무라는 점에서도 해석을 달리할 수 있다. job은 구성원 개인이 해야 할 특정 역할이나 직책으로 조직은 특정 의무와 요구사항이 정해질 수 있지만, work는 이러한 의무와 요구사항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권리와 의무 차이는 보상에도 영향을 준다. 일의 정의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