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순간에 깃든 기쁨
눈 내린 아침, 선생님께
선생님,
너무 서둘러 봄을 배웅했나 봅니다.
자고 일어나니 푸짐한 눈이 내렸습니다. 습관처럼 커튼을 열고 창밖을 바라보니 온통 새하얀 눈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겨울을 건너느라 메마르고 삭막했던 대지 위에도, 겨우내 빈 몸으로 서 있던 나뭇가지에도, 아랫마을 집들의 지붕 위에도 포근히 내려앉았습니다.
어젯밤 늦게 잠자리에 들 때까지만 해도 분명 토독토독 창가를 두드리는 봄비 소리였지요. 어느 순간 비가 그친 듯 잠잠해졌던 빗소리의 비밀을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떨어져 내리며 소리로 존재를 알리는 빗소리와 달리, 부드럽게 유희하듯 내리는 눈발은 유연한 몸짓으로 고요하게 대지 위에 안착했습니다.
제 소임을 다하고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겨울이 건네는 선물 같은 풍경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미련 없이 물러서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은 또 다른 시작을 알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갑자기 나타난 동화 속 같은 설경에 시선을 빼앗겨 한동안 창가를 서성입니다. 어쩌면 이 계절의 마지막 눈이 될지도 모를 하얀 눈을 오래도록 눈에 담아봅니다.
늘 푸른 옷으로 제 창밖을 지키던 소나무 가지 위에도 묵직한 눈이 내려앉았습니다. 옅은 바람이라도 지나는지 소나무 가지가 흔들리며 툭 하고 눈이 쏟아져 내립니다.
밤사이 소나무는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말없이 떠나는 겨울을 배웅하고 있었나 봅니다.
정말 오늘 아침은 오주석 선생의 『한국의 미 특강』에 나오는 김홍도의 편지 한 구절을 저절로 떠올리게 합니다.
“섣달 눈이 처음 내리니 사랑스러워 손에 쥐고 싶습니다.
밝은 창가 고요한 책상에 앉아 향을 피우고 책을 보십니까?
딸아이 노는 양을 보십니까?
창가의 소나무에 얹힌 눈이 가지에 쌓였는데
그대를 생각하다가 그저 좋아서 웃습니다.”
섣달에 내린 첫눈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적어 내려갔을 그의 편지는 옛 조상들의 풍류가 무엇인지 조용히 일러 줍니다.
은은한 향이 퍼지는 밝은 창가에 앉아 딸아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며 벗에게 찬찬히 편지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그 짧은 문장 속에는 삶을 바라보는 느긋한 시선과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멋스러움을 건져 올릴 줄 아는 그의 안목과 품위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 제 가슴에도 와닿습니다.
오늘 저는 그날의 김홍도처럼 섣달 눈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지만, 봄의 길목에서 겨울을 배웅하며 만나는 풍경 속에서 아침의 감흥을 함께 나눌 선생님이 있어서 행복합니다.
그 때문이었을까요.
예쁜 편지지도,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갈 펜도 준비되어 있지 않지만 오늘 같은 날은 느린 편지글을 써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핸드폰 앱을 열어 곧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풍경을 담은 사진을 찍고, 연필을 들어 몇 글자 끄적이며 편지글을 써 내려갑니다. 이처럼 아까운 풍경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함께 동봉합니다.
선생님,
우리가 삶에서 붙잡아야 할 것은 어쩌면 사소한 순간에 깃든 기쁨과 그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거창한 것을 이루려 애쓰느라 지금 내 옆에 함께하는 것들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지나쳐 버리는 어리석음 같은 것은 진작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때때로 내려놓지 못하는 마음 때문에 헛헛해질 때도 있습니다.
창밖을 보니 우리와 함께 기거하는 길냥이 녀석의 발자국만 점점이 무늬를 새겨놓았을 뿐, 아직도 하얀 눈으로 갈아입은 세상이 고요합니다. 어제까지 봄을 재촉하던 정원도 오늘은 잠시 숨을 고르는 듯합니다. 땅속에서 올라오던 여린 새싹들도 하얀 이불을 덮고 다시 잠든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은 당장 해야 할 일들을 잠시 미루어 두고 마지막 설경일지도 모를 풍경을 실컷 감상해야겠습니다. 창가의 소나무에 얹힌 눈을 바라보며 김홍도의 풍류를 흉내 내어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지금 이 순간도 사소한 순간에 깃든 기쁨과 그리움입니다.
‘찰칵’
이번에는 마음의 눈으로 정성껏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질 생의 어느 한순간을 마음속 서랍 어딘가에 저장해 두려 합니다.
가끔씩 일상의 감동이 줄어들고 심심해질 때면 서랍을 열고 사소하게 빛났던 아름다운 시간을 꺼내 보아야겠습니다.
이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합니다. 하얀 눈으로 떠나는 겨울을 배웅해야겠습니다.
오늘도 평화로우시 길요.
— 대곡 시골에서 연필 든 정원사 올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