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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3

by 연후 할아버지

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3) 내 외할머니 박춘금 여사와 <쪼끄마니>의 아내 정우순 씨


여기서 잠시 관심을 돌려, 어렸을 때의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두 여인을 소개하고자 하는데, 길고 요상한 제목을 붙인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우선, 성함 뒤에 서로 다르게 붙인 “여사‘와 ’씨‘라는 호칭이 이상해 보이겠지만, 학력과 품위에서 확연한 차이가 나서 그렇게 구분 지어 봤다. 외할머니는 학문이 높고 능하셔서 책을 항상 가까이 두신 반면에, 어머니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무식꾼이셨다. (당시의 시대상에 비춰보면, 반대로 되는 게 일반적이었을 텐데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두 분은 닮은 꼴 미인이셔서, 곁에 서 있을 땐 생물학적 모녀관계는 분명한 것 같았지만, 따로 뵐 때는 성격과 풍기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서 과연 앞선 판단이 정확했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또한,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앞의 분은 여전히 내 할머니인데, 뒤쪽은 부친(쪼끄마니)의 아내였을 뿐 내 어머니는 아니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부자간의 수없는 분쟁 중에,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나의 외할머니 박춘금여사와 남편(외할아버지)은 나이 차이가 많았고 (정확한 건 아니지만 열다섯 살이 넘게 났던 걸로 기억된다), 그녀는 친정도 없는 혈혈단신 고아라고 했는데, 한글과 한자뿐만 아니라 일본어도 능숙하게 구사하셨고, 호기심이 많으셔서 영어 알파벳과 간단한 회화까지도 독학으로 공부해서, 취학 전 꼬맹이였던 나에게 가르쳐주기까지 하셨다.


장구나 가야금 등 악기도 잘 다루셨으며, 목청이 좋아 남도민요나 판소리도 구성지게 부르셨다. 이름에 봄을 나타내는 춘(春) 자와 현악기라는 뜻의 금(琴) 자가 들어간 것도 특이하고, 그 시절의 가정집 아낙이 시와 노래에 능숙했다는 점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이런 여러 사항들을 종합해 보면 외할아버지께서 지리산 자락의 어느 기생집이나, 소리꾼의 집에서 샀거나 주워서 아내로 들어앉혀 자식들을 낳고 함께 사셨던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지만, 유추에 불과할 뿐 확인된 건 아니다.




내 어머니의 호적상 함자는 우순(又順)인데, 어렸을 때부터 <또순>으로 불러와서 당신의 이름이 그것인 줄 알고 계셨다. 우(又) 자가 ‘또’라는 뜻이니 그게 그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여자아이’라는 뜻의 순(順) 자를 붙여 놓고 해석해 보면 여러 가지 의혹이 생긴다.


장녀에게 왜 ‘또 여자아이’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또’란 의미에 무게를 둬 보면 ‘본래의 여자아이’ 혹은 ‘아이들‘이 따로 있었던 건 아닐까? 만약에 실제로 존재했다면, 그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외할아버지께서 재혼하셨고 전실 딸들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도 있는데, 후일, 외할머니와 어머니께 혹시 그 일에 관해 기억나는 게 없느냐고 물어봤지만, 두 분이 모두 그런 건 없었다고 부정하셨고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셨다.


이렇게 비밀이 많았던 분들임을 감안하면, 내가 무식한 사람이라고 매도했던 나의 모친도 자신의 능력을 숨기고 계셨을 뿐, 실제로는 무시해도 되는 그런 분이 아니셨을 수도 있다.


식구들이나 일가친척의 생일과 집안의 제삿날을 빠짐없이 챙긴 걸 보면 기억력이 탁월하셨던 건 분명하고, 제사상에 붙여 올리는 지방의 글자가 한 획이라도 틀렸을 때는 금방 발견하고 바로 지적하시는 걸 여러 번 봤던 것도 이상하다.


천재적인 두뇌로 낱개의 글자가 아니라, 전체 모양을 사진처럼 외우고 계셨다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일상의 모든 일을 남편에게 물어보고 지시를 받으면서 사셨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글자를 읽을 필요가 없어져서 그 기능만 퇴화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사내아이 낳기를 원해서 우순이란 이름까지 붙였음에도 어머니의 바로 밑 동생도 여아여서 나의 큰 이모가 됐지만, 바로 그 아래는 남자아이가 태어나 나에게 외삼촌이라 불릴 뻔했는데, 징용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그분과 만난 적이 전혀 없었다.


할머니께서는 외아들을 낳은 후에도 출산을 계속하여 딸만 다섯 명을 더 낳아 칠공주를 완성했는데, 내가 잰이모라고 부르던 막내딸은 나의 큰누님과 동갑이었다.


내가 아버지의 아내였을 뿐이라고 비난한 나의 어머니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거의 없는 분이셨다. 결혼할 때는 그래도 어머니께서 반해서 저 남자가 아니면 시집가지 않겠다고 우겼다니 평생에 단 한 번만 스스로 선택한 결정이었던 것 같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연애결혼이었던 셈이디.




어머니가 남편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사셨는지 예를 들자면, 만주에서 화재를 당했던 일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발생했던 일이고, 나도 훗날 전해 들은 얘기일 뿐이라 약간의 오차가 있을 수는 있다.)


남편이 출근하고 집에 없던 대낮에 부엌에서 불이 났는데, 안방에 아이들이 누워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멀리 떨어진 남편의 직장(학교)으로 달려가 보고부터 했다는 전설이다. 이웃들이 아이들을 꺼내줘 목숨을 건진 건 천만다행한 일이었지만, 집은 전부 다 타버렸다.


그녀 곁에 있을 때는 언제나 남편 밥상만은 손수 차렸고, 거기에는 고기반찬을 떨어뜨리지 않았는데, 자녀들이 조금이라도 그걸 훔쳐 먹으면 난리가 났다.


어린 아들이 그걸 알고 배가 아프다고 꾀병을 부리며 아버지 퇴근시간까지 기다렸다가 식사를 청했는데도 배탈이 났으니 물에 말아먹으라며 남편 밥상 위에 올릴 고기 한 점을 떼어주지 않던 매정한 어머니였다. 그녀에게는 남편만이 알파요 오메가였던 것이다.


그런 남편과 젊은 날부터 자주 떨어져 살았던 건. 모든 걸 숙명으로 여기고 순종했던 당시 여인들의 일반적인 모습이긴 하지만, 그녀에게만은 특별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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