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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5

by 연후 할아버지

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5) 초등학교 졸업과 중학교 입학


국민학교(요즘의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를 전후해서도 많은 사건들이 있었다.


6학년이 됐는데도 아무리 기다려 봐도 중학교에 진학시켜 줄 징후가 보이지 않아서, 몰래 기회를 만들어 부산으로 갔다.


부친께서 가장 존경하는 그의 셋째 형님(내게는 중부님) 삼용 씨를 찾아가 진학과 진로를 의논하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는데, 아버지가 그분의 말을 가장 잘 듣고 따르는 걸 간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부산에 있는 일류 중학교에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만 하면, 거처를 중부님의 댁으로 옮기고 학비도 그분께서 책임지겠다는 약속까지 받아냈다.


나로서는 죽을 각오를 한 결행이었으니 언제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라서 잠을 설치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피하며 아무런 의사표시도 없었는데, 나의 이런 조바심과는 무관하게 무심한 세월은 흘러 가을이 되었다.




고을의 어떤 부자가 자신의 유산인 많은 농토를 초등학교에 기부하고 죽었는데 학생들이 농사를 짓는 대신에 매년 졸업생 중 한 명을 뽑아 그에게 추수한 벼를 모두 줘서 평생 등록금으로 사용하게 하는 장학제도가 있었다. 말하자면 <지역인재 양성책>이었다.


나의 담임선생님과 아버지가 크게 말다툼을 하고 멱살잡이까지 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펴졌다. 내 사정을 잘 아시는 선생님께서는 그 해에 추수한 벼는 당연히 당신 아들의 몫이며 공부를 계속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셨고, 아버지는 내 자식은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 간섭하지 말라며 불같이 화를 내시더란다.


또한 공부를 시키더라도 자신은 타인의 도움을 받을 정도로 궁핍하지 않으니 장학금 따위는 가난한 집 자녀에게나 주라고 목청을 높였지만, 선생님의 고집도 대단하셨다. 달구지를 여러 대 빌려 볏가마니들을 싣고 먼 거리를 끌고 와 우리 마당에 내려놓고 가셨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후, 아버지는 읍내에 있는 중학교의 입학원서를 사 오셔서 내 앞에 던져 주며 말씀하셨다.


“다른 아이들은 합격하면 입학하겠지만, 너는 수석을 하고 장학금을 받아야 학교를 다닐 수 있다는 걸 항상 명심해라. 나는 학비까지 써가며 너를 공부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나는 그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친께 고맙다고 절하며 소리 내어 울었다. 또한, 그가 원하던 대로 월등한 성적으로 수석입학을 했고,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중학생이 되면 약간이라도 달라지리라 기대했지만, 나에 대한 그의 정책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가 초등학교 때보다 두 배나 늘어 사십 리 길이나 되어서, 같은 동네에 사는 다른 아이들은 하숙이나 자취를 하거나 버스를 타고 등교했는데, 나는 차비가 없어 매일 걸어서 통학했다.


늦잠이라도 자는 날에는 그 먼 거리를 힘을 다해 달려가지 않으면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후일 고등학교 <장거리 달리기>에서는 항상 일등을 했고, 대학 때는 학교를 대표하는 마라톤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메달을 받기도 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약간 달라진 게 있다면, 영감님께서 나에게 기회만 나면 많은 얘기를 하기 시작하셨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그건 항상 피곤에 찌들고 공부할 시간이 부족했던 내게는 고문에 가까운 일이었다. 연세가 드시면서 당신이 외로워졌기 때문인지 나를 교육시킬 목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이 많아지고 길어졌던 것이다.


그 내용들은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수없이 들어서 이미 알고 있던 게 대부분이었지만, 어렸을 때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도 있었고, 듣는 척만 하고 건성으로 넘겨 이빨 빠진 구석이 많았는데, 이번에는 헝클어져 있던 퍼즐이 제자리를 찾았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그분 생애도 대개는 그때 들었던 얘기들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분의 일생을 글로 써서 후손들에게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 내 아이들이 뛰노는 걸 보면서부터였지만, 그분의 장례식을 할 때 결심을 굳혔으니, 나중부터 계산해도 벌써 삼십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궁리만 하고 망설이다가 계속 포기했던 건 나의 게으름이 첫째 원인이겠지만, 바빠서 자기 일도 미처 챙기지 못하고 사는 현실 속에서 누가 생뚱맞은 타인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 여유시간이 많아 생긴 후 다시 생각해 보니, 독자의 수는 중요한 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생겨 용기를 내게 되었다.


어차피 내가 죽으면 함께 묻혀버릴 일인데 써놓으면 어떻게든 세상에 남게 되고, 인연이 닿는 누구라도 읽어, 그를 기억해 준다면 고마워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 있다.

‘대인은 온 백성이 추모하고 기억해 주지만 소인에게는 가족 밖에 없는데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는 자손은 인정머리 없는 놈이다.’


그때마다 어린 아들은 ‘그렇게 느끼셨다면 당신도 대인이 되시지 어째서 평생을 소인으로만 살았소?’ 하고 마음속으로 불평하곤 했는데, 이제는 내가 당시의 그분과 비슷한 나이가 되었지만, 나도 아직 대인이 될 꿈도 꾸지 못하고 소인 중의 소인으로 남아 있다.


대단한 철학이나 신념을 갖고 살았던 것도 아니고, 후손들이 기억할 만한 업적을 이룬 것도 없이, 시대의 바람과 물결에 떠밀려 살아온 인생이지만, 따지고 보면 이 나라 대부분의 민초들도 비슷하게 살아왔다는 동류의식에 안도감을 느낀다.


군부 독재시절, 집권자의 전기를 쓸 때 그의 부인이 “내 남편은 한국의 <아브라함 링컨>과 같은 분이니, 그분의 일생을 참고하라.”라고 했다 해서 세인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던 적이 있었다.


나도 그 부인처럼 눈에 이상이 생겼는지는 모르지만, 부친 쪼끄마니를 회억할 때마다 <주홍글씨>로 유명한 <나다니엘 호돈>의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 속의 주인공이 생각나곤 한다. 나이가 들면서 부쩍 늘어난 연민과 감상 때문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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