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첫째) 승부욕
나의 부친은 승부욕이 무척 강하신 분이셨다. 우리 수탉이 동네에서 대장노릇을 해야 직성이 풀리고, 우리 개도 인근에서 싸움을 가장 잘해야 만족했다.
그래서 초봄부터 안절부절못하셨다. 일찍 깬 병아리가 동네 대장이 될 확률이 높은데 암탉이 알을 품지 않는다고 조바심을 냈다. 그러다가 우리 수탉이 다른 닭과 싸워서 지고 들어오는 날이면, 즉시 죽여 백숙으로 삶아 먹었다. (수탉이 싸움에서 지면 이웃집 닭들이 떼 지어 몰려와 안마당을 점령해 버리므로 금방 표시가 났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날 시장에 나가 싸움을 잘할 것 같은 닭을 사 오셨다. 매년 그러다 보니 내 고향마을의 닭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대부분이 필리핀 싸움닭 사모의 후손들이다.
개도 마찬가지다. 반려동물이 유행하며 덩치가 작아진 요즘에도 그 동네의 개들은 불독이나 도사견 잡종이 대부분이다. 쪼끄마니 시절부터 투견의 피가 전해져 내려온 것이다.
닭과 개에게야 어떻게 하든 괴팍한 사람이니 그러려니 하더라도 당신의 막내아들에게까지 그 승부의 법칙을 적용해 밖에서 싸움을 하다 지거나 맞고라도 오는 날이면 난리를 쳤던 건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애는 나보다 나이가 많아 힘이 세고 덩치도 큰데 어떻게 이겨요?’ 하고 물으면, ‘옆에 몽둥이나 돌도 없더냐?’ 하는 대꾸가 즉각 돌아온다. ‘몽둥이로 패거나 돌로 찍으면 다칠 텐데...’ 하면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고 내가 처리할 문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누나들을 놀리거나 못살게 굴다가, ‘너, 아버지 들어오시면 맞고 왔다고 일러바칠 거다’ 하면 꼼짝을 못했다. 이런 모함 때문에 억울하게 맞았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니, 여자들 사이에서만 자란 당신의 아들이 밖에서 사내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싶어 세운 교육방침이었을 거로 추측되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짐작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싸움의 기술도 늘었고, 이 나이가 되도록 폭력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적은 단 한번도 없긴 했다.
에피소드 둘째) 요강
나의 형님이 병장 계급장을 달고 군대에서 휴가를 나왔던 걸로 기억되니, 쪼끄마니를 다시 만난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가축의 똥과 찌푸리기가 섞인 것을 모아뒀다가 삭힌 후 밭에 뿌려 비료 대용으로 쓰던 게 당시의 농사법이었다. 표준말로는 퇴비고, 경상도에서는 <뒤엄>이라 불렀던 걸로 기억되는 그걸 채마밭에 져다 나르는 게 내가 맡은 일 중의 하나였다.
(다른 머슴들도 여러 명 있었고 꼴때미에게 시켜도 되었을 그 일을 쪼끄마니는 굳이 왜 하필 어린 아들에게 시켰는지는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지만, 농사꾼이 되려면 험한 일부터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그날은 그 일이 하기 싫었다. 군대에서 휴가 나온 장골형제가 빈둥빈둥 놀고 있는데, 냄새나는 일을 혼자서 하고 있는 게 공평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 같다.
평소에 하던 일이라 하면서도 그날따라 불평이 많았고, <거름짐>을 지고 대문을 지나가며 욕을 했다. 형은 힘이 세니 한 번 하면 될 일을 나는 여러 번 지고 가려니 어렵다는 뜻이었을 게다.
당시의 시골집들의 구조는 대개 화장실은 냄새 때문에 본채에서 떨어진 곳에 따로 두었고, 방안에는 요강이란 걸 둬서 급한 일을 해결하게 했다.
우리 집의 화장실도 대문 옆에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볼일을 보고 있던 형이 그 말을 들었다. 욕을 얻어먹을 만했고 못 들은 척하고 넘어갈 일이었는데, 모자란 사람이었던지 그 일로 어린 동생을 혼내고 손찌검까지 했다.
하루 종일 억울했지만, 힘이 약하니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밤에 형제가 같은 방에서 자고 있는데 발치에 놓여있던 요강이 눈에 띄었다. 그걸 들어 머리를 박살 내어 버리려다 그럴 수는 없어서 요강으로 오인한 척하며 형의 머리에 시원하게 오줌을 갈겨 버렸다. 그 후의 경과는 길고 복잡하니 독자들의 상상에 맡길 수밖에 없다.
에피소드 셋째) 제사와 축문
같은 유교식이라 하더라도 집안마다 제사 지내는 방법은 약간씩 다르지만, 아직도 고려 때 포은선생이 지내던 방식을 답습하고 있는 연일정씨의 그것은 유난히 길고 특별했다.
자정에 맞춰 시작하는 그 의식은 새벽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아이들끼리 쟁탈전을 벌릴 수 있는 상에 놓인 문어와 한과들이 탐이나 졸음을 참고 버티기는 했지만, 수없이 절을 하며 이상한 주문 비슷한 걸 읽어대는 그 행위들이 초등학생이었던 내 눈에는 한심하고 부질없어 보였다. 그래서 제사가 끝난 후 부친께 여쭤봤다.
“오늘 제사음식을 먹으러 오신 조상님들 중에서 축문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분은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네가 아직 어려서 어렵겠지만 어른들은 무슨 밀인지 다 안다. 다구나 저승에 가면 모두 눈이 밝아져서 모르던 것도 알게 된다.”
“남자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집 여자들은 한글도 모르는 분들이 태반인데, 저승에는 공부하는 학교가 따로 있습니까?”
어린 아들은 계속 나불대다가 꿀밤을 맞고 나서야 멈췄다. 덕분에 화가 나서 공부한 유교식 축문은 평생을 잊지 않고 지금도 외우고 있다. 어렸을 때 외운 건 왜 세월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지?
“유세차 XX X월 XX삭 XX일 XX 효손XX 감소고유, 현고 학생부군, 세서천역, 휘일부림, 추원감시, 호천망극(영승영모) 근이 청작서수 공신전헌 상향”
“維歲次 XX X月 XX朔 XX日 XX 孝孫XX 敢昭告于, 顯考學生府君歲序遷易, 諱日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不勝永慕) 謹以淸酌庶羞 恭伸奠獻 尙饗”
“X년 X월 X일 제삿날이 돌아와, 손자 X가 삼가 고합니다. 학생부군(벼슬없이 돌아가신 분) XX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후 해가 바뀌고 그날이 다시 돌아오니 세월이 지날수록 그립고, 끝없는 은혜를 갚을 길 없어서 (조상님을 깊이 사모해서), 삼가 맑은술과 음식에 공경을 더해 올리오니 흠향하십시오.“
대강 그런 뜻인 것 같았다.
에피소드 넷째) 반장선거
초등학교 4학년 때였을 것이다. 반장선거를 했는데, 뭣 때문에 미운털이 박혔는지 모르지만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반장은 봉사하는 직책인데 공부를 잘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고 말씀하신 직후에 투표를 했는데 다른 아이가 당선되었다.
나는 분하고 창피해서 책가방도 학교에 남겨둔 채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께 억울한 심정을 하소연했는데, 이튿날 아침에 학교에 가니, 선생님은 얼굴에 피멍이 들었고 팔에 붕대를 감은 상태였다.
선생님께서는 "다시 생각해 보니 반장은 역시 공부도 잘하는 사람이라야 되겠더라."고 말씀하신 후 재선거를 실시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당선되어 반장 직무를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쪼끄마니>가 밤에 선생님을 찾아가 폭력을 휘두르며 뭐라고 협박했는지는 모르지만, 밤 사이에 역사가 바뀐 것이다. 당시에 아버지의 나이는 오십 대였고 담임선생님은 삼십 대 초반이었을 텐데,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미궁의 사건이었다.
에피소드 다섯째) 일본에서 온 돈쟁이
내가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한국어도 잘 모르는 이상한 형제가 전학을 왔고. 며칠 후 그들의 아버지라는 붕어빵 뚱보가 마을에 나타났는데 인사만 하면 계속 고액권을 준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그곳으로 달려가 잽싸게 인사를 반복하고 지폐를 여러 장 받았다. 두어 달 동안은 걸어서 등하교하지 않고 버스를 탈 수 있는 액수의 거금이었다.
자신의 영리함과 민첩함이 스스로 만족스러워서 아버지께 자랑을 쳤는데, 연유도 모르는 채 엄청나게 맞았다. 폭행을 당하면서 들은 건 “네가 거지냐?” 하는 짧은 말 뿐이었다.
“군자는 아무리 곤궁해도 거지행세를 하지는 않습니다.” 하는 정답을 내뱉고는 도망을 쳐서 가까스로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 사람은 재일교포 중에 손꼽히는 재벌이었는데, 원래는 우리 집안 종의 아들이었고 나의 부친이 일본으로 공부하러 갈 때 따라갔던 사람이라고 했다. 부친은 몸이 아파 곧 귀국했지만, 그는 끝까지 버텨서 재벌이 되어 나타났다.
사설철도가 많은 일본에서 철도왕이라고 하던데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우리 마을의 전깃불을 인근의 다른 동네들보다 십 년은 빠르게 밝혀 주신 고마운 분이다. 덕분에 석유 걱정 하지 않고 밤에 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학교 강당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낡은 손수건에 쌓인 동전 세 닢을 꺼내 보이면서 처음 일본으로 건너갈 때 자신의 어머니가 배고플 때 사 먹으라고 주신 돈이라며 눈물을 흘리던 광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내 아버지를 만나려고 우리 집에도 두 번인가 찾아왔었는데, 이쪽에서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 옛날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 내 눈에는 그분이 대인이고 나의 부친이 졸장부처럼 느껴졌다.
에피소드 여섯째) 노름꾼 수천이
수천이는 양식이 떨어지면 우리 집 상머슴으로 와서 일하다가 여유가 조금만 생기면 사라져 버리는 어중비리였지만, 쪼끄마니는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그의 임금(당시는 새경이라 부르며 연간 계약을 해서 기간을 채우지 못하면 한 푼도 주지 않는 게 관례였다. 상머슴은 벼 열섬 남짓, 애기머슴이나 꼴때미는 밥만 먹여줬던 걸로 기억된다.)을 날짜까지 계산해서 챙겨주곤 하셨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래도 그에게 큰 약점을 잡힌 것 같다고 수군대곤 했다.
수천이도 이런 쪼끄마니의 호의를 알고 있었는지, 우리 집 일을 할 때면 (특별한 재주는 없었지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하기는 했다. 그러다가 농번기가 끝나 한가해지면, 이유도 말하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한참 동안 모습을 감춰버리는 건 오래된 습관이요 고질병 같은 것이었다.
머슴들은 농번기에는 고된 노동을 피할 수 없지만, 그때만 벗어나면 밥 먹고 체면치레로 시간만 때우면 되는 직업이었는데. 임금(새경)을 제대로 받지 못할 위험을 무릅쓰고 힘들게 쌓아 올린 노력을 한 순간에 까먹곤 하는 그는 약간 모자란 사람임이 분명했다.
몇 년 동안 같은 사고가 반복되었지만, 쪼끄마니는 항상 환하게 웃으면서 그를 내치지 않고 다시 받아들이곤 했는데, 그날 내가 학교에서 돌아와 집으로 들어서다가 본 건, 평소와는 전혀 다른 광경이 전개되고 있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쪼끄마니가 지게 작대기로 그를 마구 패는데, 수천이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장면이 반복되었다. 그러다가 둘이 함께 대문을 나섰는데, 이유를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할 분위기였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수천이는 노름을 무척 좋아했는데, 그날따라 운이 없었는지 밑천을 모두 까먹고, 마지막 판에는 부인을 불모로 잡히고 붙었지만 또 졌다는데, 쪼끄마니와 함께 가서 다시 찾아왔다고 한다. 죽도록 맞을 만했다. 더 훗날, 그가 <오졸정센>이라 불리던 시절에, 문득 그 일이 생각나서 물어봤다.
“아버지, 그때 왜 그렇게까지 수천이를 감쌌습니까?”
그에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해방 직후에 빨치산에게 잡혀 발목을 삐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상태로 쌀가마니를 지고 산으로 올라갔던 적이 있었는데, 우리 집에서 머슴 살던 사람들이 모두 눈을 돌리고 모르는 척했지만, 수천이만 그를 보호했고 그 덕분에 목숨을 건졌단다.
한데 잊을 만하면 나타나던 사람이 근래에는 보이지 않는 게 이상했다.
“그 사람은 아직 살아 있습니까?”
“몹쓸 병에 걸려 오래전에 죽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