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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4

by 연후 할아버지

1. 부친과 함께 보낸 세월



4) 부친과 재회


나는 태어난 후 열 살까지는 아버지와 형님이 없이 어머니와 누님들에게 둘러싸여 집안의 유일한 사내아이로 자랐다. 나룻배로 섬진강을 건너야 하는 다른 지방(전남 광양군 다압면)에 외가가 있었는데, 그곳에도 외할머니와 이모가 여섯 명이나 있어서 양쪽 집 어디를 가더라도 왕자 취급을 받았다.


하동과 부산, 두 집 살림을 했던 우리 집보다 외가가 경제적으로는 더 풍족하고 윤택했기 때문이었는지, 이모들을 계속 시집보낸 후 연세 드신 외할머니께서 외로우셔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취학연령이 될 때까지 대부분의 시간은 외가에서 보내다가 학교에 입학한 후에야 본가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시 기억을 더듬어 봐도 유년시절에 엄마 품속보다는 외할머니의 사랑을 받았던 장면만 떠오르는데, 그 노인은 박식하고 상상력이 풍부해서 엉뚱한 나의 의문들을 빠짐없이 해소시켜 주셨다.


나는 그분 등에 업혀서 판소리, 고전문학, 역사, 지리 등의 내용을 귀가 따갑도록 듣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한글과 한문이 섞인 책을 읽고 할머니의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해야 하루가 끝났다.


훗날 내가 학창 시절에 천재소리를 자주 듣고 학업성적이 유난히 좋았던 건 그분께서 유년시절에 호기심을 충족시키며 두뇌를 계발해 주셨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시대를 잘못 만나 일찍 잃은 외아들(나의 외삼촌)에 대한 한이 산처럼 쌓여 있던 분이셨다. 그래서 나를 아들 대신에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며 키우셨다. 나는 그분의 노리개요 전부였다.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외할머니는 가산을 정리하고 당신의 고향을 떠나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 나를 키우며 의지하고 사시다가, 학교를 다닌다고 주소지로 돌아가 버리니 적적하고 외로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다시 이웃이 된 외가에 기거하며 학교를 다녔다. 할머니의 막내딸(나의 잰이모)이 함께 살다가 시집간 후에는 나와 할머니 두 식구만 남았는데, 아버지가 귀향하고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버릇을 가르친다고 나를 당신 곁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외가에 살 때도 양쪽 집을 오가기는 했지만 자유를 향유하며 살았는데, 갑자기 잡혀 돌아온 후에는 온갖 억압과 핍박과 간섭을 받는 감옥살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열 살이나 되어서야 아버지란 존재를 처음 인식할 수 있었던 사내아이에게, 만남의 시작부터 순탄하기를 바라는 건 과욕이고 마찰이 따르는 게 오히려 정상적인 반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건 아마도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어린 망아지 같던 영혼도 당신의 자식이었으니 나름대로 양육계획은 있었을 테지만, 자라온 환경과 본성은 무시하고 당신이 만든 허상의 테두리 속으로 우격다짐으로 집어넣으려고만 했으니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가두려 애쓰고 나는 반항하고 도망치려고만 했던 세월의 연속이었다.


매일 속개되었던 부친과의 전쟁 속에 나는 여차하면 외가로 피난 가는 일이 잦았는데, 중간에서 어느 편도 들 수 없었던 할머니께서는 그 상황이 당혹스럽고 속상하고 곤란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그때, 멀리 사는 둘째 사위(나의 이모부)가 와서 속 끓이지 말고 자기 집으로 가자고 유혹하니 큰 사위(쪼끄마니)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시 가산을 정리해 그들을 따라 떠나가 버렸는데,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무심한 외손자 놈은 한 번도 그분을 찾지 않은 채 아예 존재마저도 잊어버리고 살았다.


내 깐에는 부친과 재회과정과 상황을 설명하느라 용을 쓰고, 외할머니까지 동원하여 더욱 장황하고 복잡해졌는데, 두서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은 이야기가 시점마저 왔다 갔다 해서, 독자들에게는 얼마나 논리적으로 정리되어 빠짐없이 전달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지도를 놓고 살펴보니, 내가 자란 곳은 횡천면 사무소나 초등학교에서도 남쪽 끝에 상당히 멀리 떨어진 학리라는 동네였고, 외할머니께서는, 섬진강 서쪽 광양매화마을 근처의 다른 지방에서 이사 오셔서 당시는 같은 동네에 살고 계셨지만, 원래의 외가도 지도상으로는 기억했던 것만큼은 먼 거리가 아닌 듯했다.)




아버지 쪽으로 다시 초점을 맞춰보면,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던 중, 쉰 살 직전에 4.19와 5.16 혁명이 일어났는데, 정권이 계속 바뀌고 세상이 혼돈 속에 빠지자. 퇴직하고 귀향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셨던 것 같다.


그때의 상황을 유추해 보면, 마침 그의 장남이 대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가서 학비에 대한 부담감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혼자 사는 게 적적하던 차에 사법서사(요즘의 법무사) 면허를 취득했던 게 결정적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고향인 하동으로 돌아오시자마자 퇴직금으로 농토도 조금 더 마련하고 사무실도 차리셨는데, 귀농과 전업의 중간정도의 직업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지만 변호사가 없던 당시의 시골에서는 대서방이라고 부르던 사법서사의 일거리가 많았다.


농토매매와 이전, 고소장 작성과 법적인 문제의 중개자 혹은 해결사 등이 대표적인 업무였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벌이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상당히 바쁘셨다.


해마다 추수가 끝난 철이 되면 섬진강 가의 백사장에 당신의 이름을 건 씨름판을 벌려서, 장사에게는 황소를 상품으로 주곤 하셨고, 명절 전에는 고을의 노인들이나 가난한 이웃들에게 선물을 돌리곤 하셨는데 그 비용도 만만치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가족들에게는 자린고비처럼 인색해서 생활비를 준다거나 자식들에게 용돈을 주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게 내 어린 시절의 가장 큰 불만 중의 하나였다.


선물 배달은 대부분이 내 몫이었는데, 싫었지만 거부할 수 없어서 명령에는 따르긴 했지만, 그때마다 속으로 (들키면 혼나니까) 영감님께 했던 욕설을 전부 모아 놓았으면 호수 하나는 가득 채울 수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분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셨던 건 부인할 수 없다. 집에서 사무실까지 상당히 먼 거리를 자전거로 출퇴근하셨는데, 그 손잡이에는 언제나 도시락 가방이 달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언젠가 한 번 그분께 여쭤 봤던 적이 있다. 우리가 양식을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았고, 선거에 출마할 사람도 없었는데 왜 그렇게 사셨냐고? 영감님께서는 고향에서 양반이랍시고 조상 대대로 저지른 죄업이 많아서 그걸 사는 동안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고 대답하셨다.


“아버지가 온 집안의 대표였습니까? 집에 생활비를 들여놓거나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지 않았던 이유는요?”

“그래서 너희들 중에 누가 굶어 죽기라도 했느냐? 농사를 지어 남은 돈이 있는데 그걸로 충분하지 않았느냐?”

“사람이 어떻게 밥만 먹고 삽니까?”

“보릿고개에 피죽도 먹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이던 시절이다.”


내 생각은 당시에도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가족에 대한 부분은 영감님의 변명이고, 나머지는 자기만족과 허영이었을 뿐이었다.


두 명의 아들 중에 장남은 대학교를 졸업시켜 먹물로 만들었으니 차남은(당사자의 적성이나 의사는 무시한 채), 농부로 키워 노후에 당신이 의지하여 살려는 계획을 세우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내가 공부하는 것을 방해하곤 하셨다. 학용품이나 교과서도 사주지 않았으며, 학교는 멀고 시냇물을 건너야 갈 수 있는 곳에 있었는데, 날씨가 나쁘거나 농번기에 일손이 부족할 때는 그걸 빌미 삼아 결석을 강요하며 등교도 허락하지 않으셨다.


당시 시골에는 전기가 없어 밤이면 애기름(등유) 등잔불을 켜야 책을 볼 수 있었는데, 석유값을 아껴야 한다고 특별한 때가 아니면 그것마저 원하는 대로 켜지 못하게 하셨다.


그런 환경에서도 나는 특출하게 학업성적이 좋았다. 교과서나 참고서가 없으니, 친구들에게 잠시 빌려 짧은 시간 안에 터득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깡그리 외워 버렸다. 아무리 궁리해도 공부를 잘하는 것 이외에는 탈출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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