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5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5. 스님들과 함께한 기억

by 연후 할아버지 Mar 24. 2025

3) 스님들과 함께한 기억


영국인들이 <실론>이라 부르던 <스리랑카>는 작은 섬나라지만, 불교의 종주국이다. 인도의 승려와 불교도들이 힌두교와 이슬람교도들에게 밀려서 바다를 건너 도망쳐서 정착했던 곳이다. 그래서 가난하고 작은 섬은 아직도 불교의 중심이 되어 세계 각국의 스님들은 이곳으로 유학 가서 공부를 한다. 


내가 한국에서 유학 온 두 명의 스님(원○와 여□)을 그곳에서 만났던 건, 1980년대 초반이었다. 5공화국 초기, 대통령과 정부의 주요 인사들이 미얀마(버마)의 양곤(랑군)으로 정상회담을 하러 갔다가 아웅산 묘지에서 테러를 당해 그 유해들을 수습해 임시로 이곳으로 옮겨와 있을 때였으니 날짜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연대는 거의 틀림이 없을 것 같다.


당시에, 나는 독일 회사 배에 승선하고 있었고 내 아내도 동승하고 있었는데, 수리를 위해 그들의 수도 <콜롬보>항에서 한 달 이상 장기 정박을 하고 있었다.


원○스님이 나와 바둑이 맞수라 그가 자주 방선하여 대국을 벌였는데, 끝나면 시내에 있던 <신라 레스토랑>인가 하는 간판을 단 한국인이 운영하던 가게에서 소고기를 구워 먹고 곡차(라고 부르는 그것)를 나누어 마신 후 어깨동무하고 ‘나그네 설움’이나 ‘타향살이’ 같은 뽕짝을 합창하며 밤길을 걷기도 했다. 


보름달이 중천에 휘영청 떠 있던 어느 밤, 현지의 양아치들인지 강도들인지 모르는 패거리들과 싸움이 붙었다. 나는 몸이 약해 보이는 스님들을 보호하려고 주먹과 발을 부지런히 움직였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학이 한 마리 날아오르더니 왈패들을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려 버렸다. 원님이었는데, 불무도의 최고수였다.


그래서 여□스님께 그의 과거를 물어봤더니, 떡애기 때 개구멍받이로 성철스님께 맡겨져 상좌 스님으로 컸으니,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단다. 평생을 절에서만 살다가 나오신 분이라 세상 물정에는 어둡다는 말을 덧붙였다. 


며칠 더 시일이 흐르자, 콜롬보에 보관했던 시신들을 한국으로 옮겨가고, 죽은 자들의 극락왕생을 축원하는 대법회를 열었는데, 이 나라 대통령과 장관들, 로마와 직통전화를 수시로 하신다는 큰스님까지 참석했던 큰 행사였다. 


한국 대표는 대사관에서 온 사람들과 스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두 분 스님들이 초청해서 우리 부부도 함께 참석했다. 대사관 직원 하나가 신분을 묻기에 선원이라 했더니, 귀빈석에 앉지 말고 뒤로 가라 했다. 그래서 바로 일어서 퇴장하려니까, 스님들이 깜짝 놀라 만류했다. 그 덕분에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간디>라는 고산도시로 관광을 가보라는 여□스님의 권유에 따라 설레는 마음으로 아내와 함께 짐을 꾸리고 떠났던 여행도 젊었던 날의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콜롬보>에서 버스를 타고 새벽에 출발해 반나절을 산길로 계속 올라가 도착해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다. 우리나라의 경주와 비슷한 고도였는데 도시 전체가 사원과 유물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는 관광지였다. 불교의 중요한 서적들이나 유물들은 모두 그곳으로 옮겨져 있는 것 같았다.


차편이 끊어져 그날 밤은 호텔에서 자고, 이튿날 돌아오는 길에 스님들이 공부하며 기거하신다는 절을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 주셨고 큰스님께 인사도 시켜 주셨다. 큰스님은 <콜롬보> 대법회 때 봤다면서 좋은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세계 최고의 스님이라기에 미래를 보는 통찰력이라도 있는가 싶어 내심으로는 평생을 기대하고 살았는데, 개뿔 그때가 이승에서는 마지막 만남이었다. 


한국 스님들과는 한 달이 넘게 그렇게 지내다 보니 상당히 친해졌지만, 때가 되자 일단은 헤어졌다. (한 분은 우리 배가 먼저 출항하기 전에 떠나셨고 다른 분은 공부가 끝나지 않아 더 머무신다고 했는데, 어느 분이었는지는 기억이 헷갈린다.) 


그때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 가족들과 함께 해인사로 여행 간 적이 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여□스님을 다시 만났다. 동안거를 하러 온 학승들을 관리하고 교육시키는 대장이라 했다.


내가 무심코 콜롬보의 추억을 꺼내자 그는 기겁을 하며 내 입을 털어 막았다. 이곳에서는 역시 소고기와 곡차가 문제가 되는구나 싶어, 덕담만 나누다가 헤어졌다.


스리랑카에서 스님들을 만난 이후에는 불교에 대한 나의 인식도 크게 변했다. 그분들과 함께하며 참으로 소탈하고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근본을 바라보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또한 태국이나 미얀마 선원들과 동승해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착하고 종교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불교에 대한 관심을 갖고 약간의 공부를 하게 된 건 그 스님들을 만났던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분들 덕택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불교의 깊이에 대해서도 여러 차례 탄복하곤 하였다. 그분들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불교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다른 별 얘기로 여기며 살았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4. 도끼를 들고 찾아간 절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