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작년 이맘때 즈음, 나는 이혼을 하겠다는 아내를 억지로 붙잡고 부부상담을 받으러 다녔다. 어떻게든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이혼을 했고 혼자가 되었다.
외도를 한 것도, 이혼을 요구한 것도 아내였다. 하지만 나는 오랜 시간 스스로를 자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내가 좀 더 잘했더라면...'
내가 더 잘해줬더라면 외도라는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때 내가 이렇게 했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이따금씩 이런 생각이 한 번 떠오르면, 나도 모르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곤 했다. 이 감정의 이름을 나는 '후회'라고 불렀다가, 그다음엔 '미련'이라 불렀다.
어차피 내가 싫다고 떠난 사람인데, 이제와 후회는 해서 뭘 하고 미련을 가진 들 무슨 소용이겠나. 설령 내 잘못이 있다한들, 이제 그게 다 무슨 의미냔 말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 이제는 그만 집어치우자고 마음먹었다.
내가 더 나은 남편이 될 수 있었다는 생각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나름 잘한다고 했지만, 지나고 보니 후회가 남는다.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보다는 더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게 이혼을 할 이유가 될순 없다는 거다.
우리가 이혼을 한 이유는 '내가 더 나은 남편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내가 외도를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도 후에도 용서를 하겠다는 나를 밀어내고 '완강히 이혼을 요구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혼할 수 밖에 없었다.
모든 부부가 완벽하지 않다.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식는다. 하지만 그래도 부부의 관계를 유지하는 까닭은, 서로에 대한 의리와 함께 쌓아온 시간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는 그 책임을 끝까지 지려고 했다. 그걸 아무렇지 않게 내팽개친 것은 내가 아니라 아내였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정리했다. 내가 비록 좋은 남편이 아니었을진 몰라도, 이 결혼이 파탄난 책임은 내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내에게 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아내 때문에, 또는 이혼했다는 이유로 힘들어하지 말자.
돌이켜 생각해 보면, 머리로는 내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계속 스스로를 탓하며 자책하게 되었던 이유는 어쩌면 나 자신을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결혼생활을 끝까지 이어나가지 못하고 이혼을 해야 했던 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부모님이 이혼을 했기 때문에, 기필코 부모님과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었다. 아버지와는 다른 남편이 되어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이혼을 하게 되었으니 (비록 그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해도) 그걸 받아들이기가 무척 힘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젠 그만 놓아줄 때가 되었다. 자책이던, 후회던, 미련이든 간에 놓지 못하고 붙잡고 있던 그 줄을 이제는 내려놓는다. 그만하면 됐다. 아직 젊고, 남은 인생이 길다. 그러니 이제는 그만 이혼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내가 겪어보니까 이 모든 것이 몰라서 못하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안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는 감정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회복의 문제이기도 한데, 그걸 한 마디로 하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1. 시간이 흐르면 감정도 무뎌지고 기억도 희미해진다.
배신감, 분노, 우울감, 슬픔, 두려움 등등... 차마 말로 표현 못할 억장이 무너지는 여러 가지 감정을 겪었다. 그런데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무뎌진다. 기억도 점점 희미해진다. 사랑했던 감정도, 미워했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면 점점 흐려진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는 말처럼, 아무리 강렬했던 사랑도 아무리 소중했던 추억도 시간이 지나면 차츰 흩어진다. 인간이 '망각'을 한다는 것이, 신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라고 했던가. 일리가 있는 말이다.
2. 시간은 계속 흘러가기에, 언제까지 주저앉아 있을 순 없다.
시간은 내 불행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야속하게도 삶은 계속된다. 주어진 시간은 매일매일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으며, 우리는 그 끝이 언제일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하염없이 주저앉아 슬퍼하고 있을 순 없다.
아침에 눈을 뜨면 출근을 하러 나가야 하고, 그러다 보면 또 하루가 간다. 그렇게 하루, 이틀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웃고 있는 나를 만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무렇지 않은 듯 느껴지는 순간이 오고, 시간이 벌써 많이 흘렀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시간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 큰 불행을 겪은 인간에게는 하나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그냥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는 삶이 오히려 아픔에서 나를 끌어내주고 힘든 시간을 버티고 지나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중요한 것은 꺾여도 그냥 하는 마음. 그리고 그런 마음을 먹게 만드는 것은 결국 흘러가는 시간 덕분이다.
3. 살다 보면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다.
아내와 함께 보냈던 7년의 결혼 생활이 끝난 후, 혼자 남겨진 나를 덮친 것은 다름 아닌 '외로움'이었다. 한동안 나는 꽤 위태로웠다. 혼자 지내는 걸 견디기가 무척이나 힘들었고, 누구라도 만나고 싶은 충동과 욕구에 사로잡혔다. 만약 그 시기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누군가를 만났다면, 아마도 좋은 결말을 맺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 이후에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려고 했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 나의 결핍을 충족시켜 줄 상대를 찾다가 결국 또 파멸에 이르게 되었을지 모른다.
7년이라는 긴 시간을 마무리하는 데는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했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일상으로 돌아가는데 6개월 정도, 무너진 마음이 회복 되는게 또 6개월 정도.. 도합 최소 1년은 애도의 기간이 필요한 것 같다. 사랑했던 나 자신에 대한 위로, 그리고 상처받은 영혼의 회복. 혼자 지내는 생활에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시간.
지난 결혼에 대한 감정의 문제가 충분히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관계를 쌓아나갈 순 없다. 그것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서두른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마음이 급해도 참아야 한다. 여유를 갖고 스스로에게 충분히 시간을 줘야 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 마음을 다독일 시간, 상처가 아물고 회복하는 시간.
미친 듯이 운동을 한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근육이 커지지 않듯이, 다친 마음도 하루아침에 아물 수 없는 법아니겠나. 매일매일 꾸준히 운동을 하면서 조금씩 몸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처럼, 하루하루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조금씩 마음의 회복이 일어난다. 그러므로 참고 견디고 버텨야 한다. 존버가 답이라는 게 그런 의미다.
나와 같이 상처받은 누군가에게,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건네고 싶다.
"희망을 갖자. 시간은 우리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