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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지만 아름다웠던 소녀 감성

아우구스트 마케, 나무 아래 소녀들 (1914)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나무 아래 소녀들 (Girls under Trees)

- 작가 : 아우구스트 마케 (August Macke)

- 제작시기 : 1914년

- 전시장소 : 뮌헨 피나코테크 데어 모데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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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에서 인상주의 미술이 대유행한 뒤 시간이 조금 더 흘러 독일에서는 표현주의 미술이 대유행하였다. 1900년을 전후하여, 당시 유럽 열강보다 산업화에 한 발 뒤쳐진 채 민족끼리 분열된 혼란한 독일의 현실은 젊은 예술인들에게 좌절감과 우울함을 선사했고, 그런 불안한 내면은 거칠고 과감한 감정의 표현으로 캔버스에 옮겨졌다. 그래서 이 당시 독일 표현주의 미술은 키르히너처럼 거칠고 날 것 그대로의 감성을 표출하거나, 칸딘스키(비록 그가 독일인은 아니지만)처럼 아예 현실에서 이탈한 본인만의 우주를 표현하는 추상화의 길로 접어든다.


당시 독일 표현주의 미술계에서 북부의 '다리파(Die Brücke)'와 쌍벽을 이룬 그룹이 남부의 '청기사파(Der Blaue Reiter)'였다. "푸른 말"을 그린 프란츠 마르크, "기사"를 그린 바실리 칸딘스키가 투톱이 되어 뮌헨을 중심으로 새로운 흐름을 이끌었다. 이때 마르크와 칸딘스키를 잘 따른 젊은 화가가 있었다. 그 역시 표현주의에 빠져들었고, 파리 여행 중 만난 오르피즘의 창시자 들로네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색과 구성을 탐구하면서 주목할 만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20대 초반의 나이에 두각을 나타내면서 이른바 '포텐 터진 유망주'의 포지션을 차지한 이 화가, 아우구스트 마케(August Macke)다. 표현주의가 으레 그러하듯 그는 자신의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그의 선은 키르히너처럼 거칠지 않고 부드러웠고, 그의 구성은 칸딘스키처럼 추상적이지 않고 비교적 현실을 반영했으며, 그의 색은 마르크처럼 과장되지 않고 절제되었다.

그러면 마케의 그림은 낭만주의적이거나 사실주의적이었는가, 묻는다면 절대 그렇지 않다. <나무 아래 소녀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여러 명의 소녀들이 나무 아래 모여있다. 하지만 소녀들의 이목구비를 생략했고 원근감도 현실적이지 않다. 그는 다른 표현주의 미술이 감정을 표현하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작품을 "설계"하였다.


이 작품은 마케가 스위스 호수가에 잠시 머물 때 그렸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그림 속에 호수가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아야 호수의 존재를 눈치챌 수 있는 이유는, 호수와 인물이 같은 푸른 색을 베이스로 중첩되기 때문이다. 나무도 마찬가지다. 굵은 나무 줄기가 있는 곳에 서 있는 소녀는 갈색 옷을 입었고, 빛을 받아 노란색에 가까운 나뭇잎이 있는 곳에 노란색 모자가 겹친다.


즉, 작품 속에서 인물과 자연은 하나로 합쳐진다. 비슷한 색채, 중첩되는 구도, 그렇게 수직으로 선 나무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리듬감 있게 연결된다. 거칠지 않은 부드러운 붓선의 힘으로 인물과 자연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순수의 상징인 소녀들이 하나가 되었다. 마케는 우울한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 현실을 정화하기를 원했다.


독일 표현주의 장르에서 현실을 송곳처럼 찌르고 내면의 비명을 외치며 명성을 떨친 화가는 많지만, 이렇듯 부드러운 시선으로 현실을 정화하고자 한 화가는 많지 않다. 젊은 유망주 마케는 자신만의 개성을 일찍 확립하였고, 작품을 거듭할 수록 그 완성도가 높아졌으며, 독일 내에서는 이미 주목받았고 유럽으로 그 명성이 알려질 찰나까지 발전하였다.


그의 세계관이 무르익은 <나무 아래 소녀들>이 완성된 게 1914년이다. 그리고 이 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마케는 징집되어 전쟁터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따뜻한 시선으로 현실을 정화하고자 했던 화가는 가장 극단적으로 참혹한 전쟁터에서 자신의 세계를 마감하고 말았다. 마케의 세계는 그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독일 미술계에서 하나의 독보적인 흐름으로 평가받는다. 짧지만 아름다웠던 그의 소녀 감성이 지금도 기분 좋은 따뜻한 순수를 느끼게 한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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