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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일러스트의 위엄

알폰스 무하, 히아신스 공주 (1911)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히아신스 공주 (Princess Hyacinth)

- 작가 : 알폰스 무하 (Alphonse Mucha)

- 제작시기 : 1911년

- 전시장소 : 프라하 무하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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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렵하고 깔끔한 선, 감각적인 색, 시선을 사로잡는 작화 실력. 아무런 배경정보 없이 이 작품을 보여주면 일러스트레이터 프로그램을 이용해 제작한 현대의 창작물이라고 생각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은 소프트웨어의 힘을 빌릴 수 없던 110여년 전 완성되었다. 당시에도 '어나더 레벨'의 완성도로 이목을 끌었던 아티스트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다.


체코 출신의 무하는 파리에서 활동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그는 포스터, 포장지, 캘린더 등 상업적 인쇄물의 삽화를 주로 그렸다. 굳이 오늘날 기준으로 부연하면, 회화과 출신이 아니라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만든 포스터를 파리 길거리에 붙이면, 붙이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뜯어가버릴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아르누보 바람이 불던 20세기 초, 무하의 작품은 아르누보의 교과서라 해도 과언이 아닌 모든 것이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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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적 인쇄물은 여러 장을 인쇄해야 하므로 무하는 리소그래피(물과 기름의 물성을 응용한 평판인쇄 기법)를 널리 활용했다. 일부 작품은 전시 또는 보관용으로 광고 문구를 삭제하고 인쇄하기도 하였다. 이 작품 <히아신스 공주>도 그러하다. 공연 홍보 포스터로 그렸는데, 광고 문구를 빼고 인쇄한 보관용 에디션이다. 물론 캘리그래피 수준의 우아한 아르누보 타입의 타이틀은 그대로 두었다.

<히아신스 공주>는 무하가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고국 체코로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만든 작품이다. 파리에서 명성을 얻은 아티스트가 고국에 돌아왔으니 체코에서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무하는 프라하에서 공연할 발레극 <히아신스 공주>의 포스터 작업을 맡았고, 여배우가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구도로 삽화를 그렸다.

이때 배우의 의복은 체코 모라비아 지역의 민속의상을 참조하여 히아신스 꽃의 특징을 더해 완성했다고 한다. 또한, 장신구와 배경의 무늬도 체코 각지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리소그래피 기법으로 이렇게 화사한 컬러를 정교하게 표현하는 것도 보통 기술이 아니다. 마치 오늘날 인쇄소에서 오프셋 인쇄로 깔끔하게 인쇄물을 뽑아내듯, 한 세기 전에 무하는 세밀하게 아름다운 공주를 구현하였다.


아직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하지는 못했지만 민족주의 에너지가 끓는점에 거의 다다른 1911년, 민족주의적 요소를 가미한 창작 공연이었다고 하니 무하에게도 매우 뜻깊은 프로젝트였을 것이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고국에서 무하의 명성은 "역시 최고"라는 신뢰를 얻었다. 이후 무하는 삽화가 아닌 회화로 슬라브 민족의 대서사시 연작을 그리면서 체코 민족의 거두로 확실히 자리매김한다. 지금도 체코의 미술인으로 알폰스 무하를 능가할 이를 찾기 힘들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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