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누스바움, 어리석은 광장 (1931)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어리석은 광장 (The Folly Square)
- 작가 : 펠릭스 누스바움 (Felix Nussbaum)
- 제작시기 : 1931년
- 전시장소 : 베를린 갤러리
베를린의 랜드마크 브란덴부르크문이 보인다. 이것은 필시 현실의 영역이다. 상당히 큰 캔버스는 여백을 찾을 수 없을만큼 피사체로 가득 찼다. 현실의 영역을 빌려 이렇게 가득 채울 정도라면 작가가 할 말이 많은 게 분명하다. 조금 더 연구해보기로 했다.
가장 눈길이 먼저 가는 부분은 건물 옥상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자화상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젤 위에 보이는 얼굴은 독일 화가 막스 리버만(Max Liebermann)으로 보인다. 그의 자화상이 실제로 이와 유사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31년에 막스 리버만은 80대의 원로화가였으며 당대 생존화가 중 가히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닌 위상을 지녔다. 그런 리버만이 자화상을 그리는 와중에 그 너머로 천사상이 부러져 날아간다. 이 천사상은 베를린의 또 다른 랜드마크 전승기념탑이다. 민족의 승리를 찬양하는 상징물이 부러져 날아가고 월계관은 바닥으로 떨어지는 중이다.
이번에는 캔버스의 왼쪽을 보자. 베를린 예술 아카데미(Akademie der Künste)라고 적힌 건물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입장한다. 그들의 발밑에는 레드카펫이 깔려있고, 꼬마 천사들이 꽃잎을 뿌리고 나팔을 불며 찬양하고 있다. 고상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은 모두 노인이다. 예술 아카데미는 지금도 브란덴부르크문 앞 광장에 위치하고 있는데, 독일 예술인 중 최고 영예를 가진 작가들이 정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는 권위 있는 학술기관이다. 따라서 레드카펫을 밟고 입장하는 노인들은 아카데미 정회원인 원로 예술인으로 해석된다.
캔버스 중앙에는 허름하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예술 아카데미를 노려본다. 그들은 손에 그림을 들고 있고, 외모를 보았을 때 젊은 화가들로 유추할 수 있다. 표정을 보건대, 들어가고 싶어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바라보면서 누군가는 반발심을 품고 누군가는 무력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젊은 화가들은 그들의 작품을 광장에 내려놓고 시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란하다. 펠릭스 누스바움은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그림을 그렸을까? 브란덴부르크문과 전승기념탑이라는 실존하는 랜드마크를 배경으로 가져왔고, 예술 아카데미라는 실존하는 기관을 작품에 실명 그대로 삽입하였고, 실명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누가 봐도 막스 리버만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 등장하게 하였다. 참고로, 이 시기의 예술 아카데미 원장이 막스 리버만이다.
다시 하나씩 의미를 톺아보자. 최고의 명예를 가진 막스 리버만 앞으로 천사상이 날아가고 월계관은 떨어진다. 막스 리버만이 얻은 영예가 추락한다며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예술 아카데미에 입장하는 원로 화가들을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화려하고 영예롭게 꾸몄다. 과장된 표현을 통한 역설적인 조롱이다. 그러면 누스바움은 당대 원로 화가들과 미술계 기득권을 조롱하려고 그림을 그렸을까?
막상 캔버스 중앙의 젊은 화가들이 들고 온 그림도 그다지 수준이 높아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의 표정은 "내가 들어갈 곳인데 저 노인들 때문에 내 자리가 없"다고 불만인 것 같은데, 그들의 작품은 그 정도 수준이 아니다. 즉, 젊은 화가들이 미술계 기득권에 불만이 많으나 그럴 자격이 없다고 또 한 번 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누스바움은 어느 한 편을 들지 않는다. 막스 리버만도 까고, 원로 예술인도 까고, 젊은 예술인도 깐다. 소위 "모두까기"의 경지. 그래서 작품 제목이 <어리석은 광장>이다. 이 광장에 있는 사람 중 그 어느 한 사람도 위인은 없고 승자는 없다며 신랄하게 풍자하는 그림인 것이다.
1931년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거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시기, 그리고 곧 나치가 급부상하는 시기로 이어진다. 극도로 혼란하고 암울한 시기, 누스바움은 미술계의 혼란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꼬집고 싶었던 모양이다. 덕분에 관람하는 재미에 더하여 해석하고 추론하는 재미까지 갖춘 빼어난 작품이 탄생하였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