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래도 나의 길을 가려 해 (1)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 밤의 방랑자 (1920)

by 유상현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밤의 방랑자 (Night Prowler)

- 작가 :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 (Marianne von Werefkin)

- 제작시기 : 1920년

- 전시장소 : 비엔나 알베르티나 미술관


148small.jpg

그녀는 소위 '금수저'였다. 아버지는 러시아 귀족이며 장교였고, 아버지 사후 막대한 연금을 상속받았다. 가만히 있기만 해도 거금이 수중에 들어왔다. 그림에 재능이 있는 연하의 젊은 화가와 마음이 통해 밀접히 교류하다가 함께 독일 뮌헨으로 떠났다. 다만, 연금을 받으려면 미혼이어야 했기에 결혼은 하지 않았다. 사실혼 관계로 오랫동안 함께 지낸 화가가 표현주의에 이름을 제대로 남긴 야블렌스키였으니 말 다했다.


그녀는 뮌헨에서 여러 화가와 마음이 통했다. 신선한 미술을 추구하는, 그러나 기반이 없는 이들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렇게 젊은 화가들의 그룹이 만들어졌다. 바로 그 전설의 블루라이더(청기사파)의 창립멤버 프란츠 마르크와 바실리 칸딘스키, 그리고 주요 멤버이자 사실혼 관계의 연인 야블렌스키 등을 키워낸 '어머니'와 같은, 그러면서 본인도 그림을 그렸던 화가. 마리안느 폰 베레프킨이다.


이대로면 탄탄대로였겠지만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블루라이더는 와해되었다. 그룹의 '간판'인 프란츠 마르크는 징집되어 전사하였고, 러시아 국적의 칸딘스키는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베레프킨과 함께 스위스로 피신한 야블렌스키는, 이제 미술계에서 본인의 입지를 구축하게 되자 베레프킨을 버리고 떠나버렸다. 설상가상으로, 풍족한 연금은 러시아혁명 후 끊겨버렸다. 이것도 야블렌스키가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아니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

스위스에 홀로 남은 베레프킨은 생활고에 시달렸지만 그림은 계속 그렸다. 다만, 그림을 적극적으로 세일즈하지는 않았고 삽화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밤의 방랑자>는 딱 그 시기에 완성된 그림이다. 눈 덮힌 숲속,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정체를 특정하기 어려운 야생동물이 홀로 걷는다. 쓸쓸함과 고독함이 느껴지지만, 이 동물은 길 한가운데를 당당히 걷고 있다.


작중의 '방랑자'는 명백히 베레프킨을 은유한다. 화가로서 명성을 얻고 동료들과 함께 세간에 인정받던 시절은 갔다. 전쟁도 겪었고 동지를 사별했으며, 사랑하는 사람은 떠나가버렸다. '금수저'였지만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쓸쓸하고 고독하다. 그녀는 밤처럼 어두운 현실을 홀로 걷는다.

하지만 숨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길 중앙을 당당히 걷는다. 밤이지만 달빛이 환하다. 마치 낮처럼, 태양처럼, 달은 앞길을 환하게 비춰준다. 이렇게 밝은 달빛이라면 필시 나뭇가지에 쌓인 눈은 별처럼 반짝반짝 빛났으리라. 그렇게 베레프킨은 참담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화가로서 "나의 길을 간다."며 <밤의 방랑자>에서 당당히 선언한다.


괴롭지만,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당당히 간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아니, 모든 인생은 아프다. 그래도 걷는다. 기왕이면 당당하게 나의 길을 걸어야겠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keyword
이전 27화이 광장에 승자는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