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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지옥인 것을

프란츠 세들라체크, 악마의 세계 (1920)

by 유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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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악마의 세계 (Diablerie)

- 작가 : 프란츠 세들라체크 (Franz Sedlacek)

- 제작시기 : 1920년

- 전시장소 : 린츠 렌토스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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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느낀 감정은 당혹감이다. 기괴한 형태의 캐릭터가 캔버스에 빼곡한데, 하나씩 떼어놓고 보면 징그럽다고 느껴질만한 캐릭터들이 한 데 모여있는 군상이 발랄하고 귀엽게 느껴졌다. 당연히 현대미술일 줄 알았건만 100년도 더 지난 1920년 작품이다. 요즘 SF 만화에 나올 법한 가벼운 톤의 캐릭터 열전, 대체 100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오스트리아 화가 프란츠 세들라체크는 신즉물주의 화가로 분류된다. '즉물(卽物)'이라 함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는 '사실'이 아닌, 현실을 즉시하고 사회의 폐부를 회피하지 않으며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사실'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사회의 폐부를 날 것 그대로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것은 대중이 수용하기에 걸림돌이 되므로, 이들은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에서 환상처럼 현실을 풍자하는 걸 즐겼다.


세들라체크는 그 선봉에 선 화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기도 했다. 전쟁의 그 흉악한 현실을 마주한 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뒤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지만 이미 사회는 그가 보기에 일상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저지른 가장 끔찍한 환경을 목도했기에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 기저에 깔렸을 것이고, 전후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경제불안은 여기에 기름을 부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세들라체크가 바라본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도였다. 상처받은 인간들이 남에게 상처주는 행위를 꺼리지 않는 아비규환의 세상이었다. 그에게 현세와 지옥의 구분이 무의미했을지 모른다. 그의 주변에 존재하는 무수한 인간들이 지옥에 존재하는 악마처럼 보였을지 모른다. 만약 인간이 악마라면, 지금 이 흉악하고 혼란한 세상은 악마에게는 파라다이스일 것이다. 기뻐 춤추고 남을 것이다. 그래서 이 그림이 탄생했다. 전쟁이 끝난 이듬해인 1920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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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을 본다. 기괴한 캐릭터는 그가 상상한 악마의 형상들이다. 그런데 악마가 몹시 신나고 발랄하다. 이토록 혼란한 세상은 악마에게는 유익하고 즐거운 파라다이스일 테니까 당연하다. 끔찍한 전쟁을 겪은 그에게 세상은 지옥도(地獄圖)와 다를바 없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런데 악마들의 파티와 같은 이 발랄한 현장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 깊은 구덩이에서 악마 캐릭터보다 더 거대하고 흉측하고 시커먼 것들이 올라온다. 어쩌면 이것은 세들라체크의 경고다. 너희들이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희희낙락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너희들의 그 업보가 더 큰 죄를 잉태하여 결국 세상을 끝장낼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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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경험한 세들라체크가 지옥 같은 현실을 즉시하여 마치 SF 판타지 같은 은유로 풍자하였건만, 사람 사는 세상은 결국 최악을 향해 치닫기 마련. 두 번째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세들라체크는 또 한 번 전쟁을 경험하였다. 옐로카드를 받고도 정신 차리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인간들의 세상, 그것이 결국 악마가 사는 지옥과 같은 세계라고 세들라체크는 이야기한다.


100년도 더 지난 그림이다. 화폭에 담긴 지옥도는 한 세기 전의 일일 뿐일까? 내가 사는 세상도 큰 차이는 없어보인다. 현실이 지옥이고, 악마의 파티장이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인간성을 붙들기 위해 애써야 한다. 나와 너, 우리 모두.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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