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리안 코르터베흐, 출발 (1914)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 작품명 : 출발 (Departure)
- 작가 : 아드리안 코르터베흐 (Adriaan Korteweg)
- 제작시기 : 1914년
- 전시장소 : 뮌헨 렌바흐하우스 미술관
추상미술은 어렵다. 긴장하고 집중하고 들여다봐야 한다. 그렇게 들여다봐도 그 안에서 맥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그런데 이 작품, 살짝 집중하니 뭔가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작품의 중앙 부근에 한 사람이 보인다. 사람의 정면으로 곧게 뻗은 선이 길처럼 이어진다. 필시 이것은 사람이 나아갈 방향을 지칭함일 게다. 사람의 주변엔 전체적인 톤과 색감이 다른 푸른 채색이 더해져 마치 '아우라'를 발산하는 듯하다.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림의 좌상단에는 입을 벌리고 이빨을 드러낸 괴수 같은 이미지가 드러난다. 이 거친 추상 속에 눈, 코, 이빨의 실루엣이 보이니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다. 사람을 한 입에 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괴수가 앞길을 가로막는다.
그림의 우측에는 몽둥이를 흔들고 있는 거인의 이미지가 드러난다. 왼팔은 웅크리고, 오른팔에 몽둥이를 들고 휘두르는 형상이 추상을 뚫고 드러난다. 한쪽에는 괴수가 이빨을 드러내고, 다른 한쪽에는 거인이 물리적으로 위협하는 상황이다.
네덜란드 화가 코르터베흐가 이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의 나이는 고작 24세에 불과했고,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지 1년 남짓 된 신인이었다. 그는 칸딘스키를 특히 존경했으며 독일 뮌헨에서 블루라이더(청기사파)와 밀접히 교류하였다. 칸딘스키의 추상에 큰 영향을 받았지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가운데 색을 두텁게 칠하여 마치 '덩어리 진' 질감으로 심리 세계를 그렸다는 점에서는 독창적인 화풍을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코르터베흐는 이 작품의 제목을 <출발>이라고 하였다. 그림 속 사람은 이제 길을 떠나려 한다. 그의 출발 앞에 괴수와 거인이 방해하고 위협한다. 이빨을 드러낸 괴수는 언제라도 삼켜버릴지 모를 내면의 공포, 몽둥이를 든 거인은 언제라도 공격할지 모를 외부의 현실로 읽힌다.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다. 거인의 몽둥이 아래에 또 한 명의 인물이 보인다. 그는 길에서 이탈하여 그림 밖으로 황급히 퇴장하는 것 같다.
이러한 느낌의 조각을 이어붙이면 <출발>은 이렇게 해석된다. 이제 길을 떠나려는 출발점에 선 사람, 그는 내면의 공포와 외부의 위협적인 현실을 뚫고 목표점을 향해 나아가려 한다. 강한 다짐을 한 듯 그의 주변에 신비로운 아우라가 피어난다. 그보다 앞서 길을 떠난 누군가는 결국 현실에 순응하고 길에서 이탈했지만 그는 목표점을 응시하며 '출발'하려고 한다.
마치 홀로 밤길을 걷는 베레프킨처럼, 혼란한 시대에 굴하지 않고 나만의 길을 가겠다는 당찬 선언을 보는 것 같은 그림이다. 코르터베흐의 <출발>은 곧 그의 출사표인 셈이다.
다만, 이러한 당찬 선언에도 불구하고 코르터베흐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출발>이 완성된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그는 독일을 떠나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했으며, 혼란한 시대를 바라보며 그림보다 평화운동과 신지학에 더 몰두하였다. 징집을 거부하고 차라리 감옥행을 택하였고, 건강이 악화된 채로 1917년 인도행을 택했다. 그리고 인도에서 질병으로 숨을 거두었다.
27세에 요절한 짧은 인생 중에서도 화가로서의 활동은 1~2년뿐이었지만, 그 짧은 시기에 남긴 코르터베흐의 독특한 추상미술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환경에 굴하지 않고 짧고 굵게 살다 간 코르터베흐의 출사표에 조금 더 깊은 여운이 느껴진다.
<여행지에서 만난 그림 한 점>
미술에 문외한인 여행작가가 여행 중 만난 미술 작품을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어느날은 길게, 어느날은 짧게, 어느날은 비평으로, 어느날은 감상으로, 하여튼 미술을 말합니다.
(매주 수요일 연재)